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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치초郗超가 추천한 사현謝玄, 부견符堅을 박살내다

by taeshik.kim 2020.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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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세설신어世說新語》 제7권 식감識鑒 편에 나오는 일화다. 현존본에서는 이 편 22번째 이야기로 수록됐다. 식감識鑒이란 간단히 말해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다. 

 

아래 텍스트는 《세실신어잔소世說新語箋疏》(여가석余嘉錫 撰)에 기반한다. 익히 알려졌듯이 《세설신어》는 남북조시대 유송劉宋 유의경劉義慶 찬이지만, 본문이 너무 간단해 이를 보완한 해설본 혹은 보완본이 이미 같은 육조시대 소량蕭梁 유효표劉孝標 손을 거쳐 나오니 세상에서는 이를 《세설신어주世說新語注》라 한다. 

 

파란색 고딕이 유의경 원문이고, 그 사이에 첨가한 검은 글씨가 유효표가 덧보탠 부분이다. 이에서 보듯이 주석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분수다. 번역은 김장환 역주(살림 간)을 인용하되 약간 수정을 가한다.   

 

동진과 전연이 맞선 시기

 

 

22 郗超與謝玄不善。〔一〕符堅將問晉鼎,既已狼噬梁、岐,〔二〕又虎視淮陰矣。車頻秦書曰:「符堅字永固,武都氐人也。本姓蒲,祖父洪,詐稱讖文,改曰『符』。言已當王,應符命也。堅初生,有赤光流其室,及誕,背赤色隱起,若篆文。幼有美度,石虎司隸徐正名知人,堅六歲時,嘗戲於路,正見而異焉,問曰:『符郎!此官街,小兒行戲,不畏縛邪?』堅曰:『吏縛有罪,不縛小兒。』正謂左右曰:『此兒有王霸相。』石氏亂,伯父健及父雄西入關,健夢天神使者朱衣冠,拜肩頭為龍驤將軍。肩頭,堅小字也。健即拜為龍驤,以應神命。後健僭帝號。死,子生立,凶暴,群臣殺之而立堅。堅立十五年,遣長樂公丕攻沒襄陽。十九年,大興師伐晉,〔三〕眾號百萬,水陸俱進,次於項城。自項城至長安,連旗千里,首尾不絕。乃遣告晉曰:『已為晉君於長安城中建廣夏之室,今故大舉渡江相迎,克日入宅也。』」于時朝議遣玄北討,人間頗有異同之論。唯超曰:「是必濟事。吾昔嘗與共在桓宣武府,見使才皆盡,雖履屐之間,亦得其任。以此推之,容必能立勳。」〔四〕元功既舉,時人咸歎超之先覺,又重其不以愛憎匿善。〔五〕中興書曰:「于時氐賊彊盛,朝議求文武良將可鎮靖北方者。衛大將軍安曰:『唯兄子玄可任此事。』中書郎郗超聞而歎曰:『安違眾舉親,明也。玄必不負其舉。』」

 

 

비수지전 지점과 양국 이동 경로

 

[유의경 본문]

치초郗超는 사현謝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견符堅이 장차 진晉을 병탐하려고 이미 량梁과 기岐 두 지역을 승냥이처럼 집어삼킨 데 이어 호시탐탐 회음淮陰까지 넘보던 형국이었다.(1)  이때 조정에서는 사현을 보내 북쪽을 정벌하자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못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오직 치초만이 말하기를 "그가 반드시 일을 해낼 겁니다. 내가 옛날에 그와 함께 환선무桓宣武의 관부官府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지켜보니 사람들 재능을 다 발휘케 하고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 해도 반드시 그가 지닌 재능을 다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틀림없이 공을 세울 겁니다"고 했다. 큰 공을 세우자 당시 사람들이 치초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감탄하는 한편, 애증愛憎하는 감정으로 사현이 지닌 재능을 덮어버리지 않았음을 높이 평가했다.(2)

 

붉은선 남방이 부견이 공량한 동진 땅

 

 

[유효표 注]

(1) 차빈車頻은 《진서秦書》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부견符堅은 字가 영고永固이며, 무도武都의 저족氐族이다. 본래 성姓은 포蒲씨이니 할아버지 포홍洪은 도참문으로 사람들을 잘 속이면서 성을 부符로 바꾸었으니 그러면서 말하기를 왕이 될 것이라 마땅히 천명에 부응해야 한다고 했다. 부견이 태어날 적에 붉은빛赤光이 산실로 스며들었는데 태어나 보니 등짝에 붉은색 기운이 슬쩍 비쳤는데 전서篆書 같았다. 어려서 기량이 훌륭했으니, 석호石虎의 사예司隸 벼슬로 있던 서정徐正이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부견이 6살 적에 길에서 노는 장면을 보면서 서정이 기이하게 여기며 묻기를 "이보게 부씨집 도련님. 이곳은 관리들이 다니는 길이라 어린이가 뛰어노는 데가 아닌데 잡혀가지 않을까 두렵지 않니?" 하니. 부견이 대답하기를 "관리들은 죄 있는 사람만 잡아가지 저 같은 어린애는 잡아가지 않아요"라고 했다. 서정이 좌우 사람들테 말하기를 "이 아이한테는 왕이 되어 세상을 제패할 상이 있다"고 했다. 석씨石氏가 난을 일으키자 큰아버지伯父 부건健과 아버지 부웅雄은 서쪽으로 가서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부건이 꿈에 천신天神의 사자使者가 붉은옷과 관朱衣冠을 걸치고서는 견두肩頭를 용양장군으로 삼는 것을 보았다. 견두肩頭는 부견의 어릴 적 字다. 부건은 즉시 부견을 용양장군에 임명함으로써 신명神命에 부응하고자 했다. 나중에 부건이 참람되게도 황제를 자칭했다. 부건이 죽고서 그 아들이 섰지만 흉폭凶暴해 뭇 신하가 그를 죽이고는 부견을 세웠다. 부견은 재위 15년째가 되자 장락공長樂公 부비符丕를 보내 양양襄陽을 공격해 함몰했다. 19년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잔晉 정벌에 나서니 말하기를 백만이라 하면서 뭍과 강을 통해 동시 진격하고는 항성項城에 머물렀다. 항성에서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깃말이 천리였으며 머리와 꼬리가 끊어지지 아니했다. 그러고선 사신을 보내 晉에 이르기를 "晉 군왕을 위해 장안성長安城에 고래등 같은 저택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군사를 대대적으로 이끌고서는 강을 건너 영접할 것이니 날짜를 골라 저택으로 들어오시오"라고 했다.

 

(2) 《중흥서中興書》에 보이는 말이다. 이때 저족氐族 쌍놈들이 강성해지자 조정에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훌륭한 장수로 북방을 진수하고 안정시켜야 할 이를 찾고 있었으니 위대장군衛大將軍 사안謝安이 말하기를 "오직 현의 아들인 사현謝만이 이런 일을 감당할 만 합니다"고 했다. 중서랑中書郎 치초郗超가 듣고는 감탄하기를 "사안이 중론에 맞서 친족을 추천한 일은 현명하다. 사현은 반드시 그의 추천을 배신하기 않을 것이"고 했다. 

 

비수지전

 

[여가석余嘉錫 箋疏]

【校文】
「符堅」「符」,景宋本俱作「苻」,是。

【箋疏】
〔一〕 嘉錫案:晉書超傳曰:「常謂其父名公之子,位遇應在謝安右。而安入掌機權,愔優游而已。恒懷憤憤,發言慷慨,由是與謝氏不穆。安亦深恨之。」超之與謝玄不善,蓋亦由此。

〔二〕 程炎震云:「梁謂梁州。寧康元年冬,秦取梁、益二州。岐字無著,或益之誤。」

〔三〕 程炎震云:「此十五年、十九年,並是苻堅建元之年,非始立之年也。車頻本書,不應有誤。蓋本是『堅建元十五年』云云,今本出於後人妄改。堅之建元十五年,是為晉太元四年己卯,其十九年則太元八年癸未也。」

〔四〕 嘉錫案:善知人者觀人於微,即其平居動靜之間而知其才。吳志潘濬傳注曰:「樊伷頗能弄脣吻,而實無才略。臣所以知之者,伷昔嘗為州人設饌,比至日中,食不可得,而十餘自起,此亦侏儒觀一節之驗也。」劉惔之論桓溫,郗超之知謝玄,皆觀其一節而已。

〔五〕 程炎震云:「據通鑑百零四:太元二年,謝玄以征西司馬為兗州刺史,領廣陵相。其年十二月,郗超卒。淝水之役,超固不及見。堅將彭超等攻彭城淮陰,亦後超卒一年。」嘉錫案:謝玄以太元二年冬十月為兗州刺史,已見晉書孝武帝紀。惟郗超之卒,本傳不著年月,獨見於通鑑耳。文選謝玄暉和王著作八公山詩注引中興書曰:「時盜賊彊盛,侵寇無已。朝議求文武良將可以鎮北方者,衛將軍謝安曰:『唯兄子玄可堪此任。』於是建武將軍兗州刺史領廣陵相,監江北諸軍事。」孝標注與選注所引互有詳略。太平御覽五百一十二合為一條。觀其言,則安之舉玄與郗超之歎玄不負所舉,皆在太元二年玄刺兗州之時可知矣。惟謝安之拜衛將軍,據孝武紀在太元五年五月。中興書於此時已稱衛將軍安,不免小有差互耳。唐修晉書(玄傳)與何法盛悉合。世說云苻堅將問晉鼎,似是太元八年苻堅傾國入侵時事。然云虎視淮陰,則正是預指後來三、四年間秦據彭城,克淮陰,拔盱眙事也。雖遣玄時淮陰尚未失,而堅已有此謀矣。孝標引秦書「堅建元十九年大興師伐晉」以注之,殊為失考。程氏頗疑其誤,而言之未暢,故復考之如此。

 

 

[태식台植 補]

치초郗超(336~378)는 字가 경흥景興인데 경여敬輿라 쓰기도 했다. 어릴 적 字는 가빈嘉賓이라라, 고평高平 금향金鄕(지금의 산동 금향) 사람이다. 동진東晉시대 관리이자 서법가書法家이면서 불학가佛學家다. 태위太尉를 지낸 치감郗鑒의 손자이면서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역임한 치음郗愔의 아들이다. 

고평 치씨高平郗氏 출신으로 무군연撫軍掾 정서연征西椽 대사마참군大司馬참參軍, 산기시랑散騎侍郎, 중서시랑中書侍郎,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환온桓溫의 모주謀主로서 환온한테 권하여 황제를 폐위하여 위엄을 세우라 권고하기도 했지만, 환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온이 제3차 북벌을 감행할 적에 동행했다가 대패하자 회귀했다. 

환온이 죽은 후 어머니 상으로 사도좌장사 직을 사임했으며 나중에 복귀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고 나중에 다시 선위장군宣威將軍, 임해태수臨海太守 등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태원太元 2년 12월 병서病逝하니 향년 42세였다. 

그는 초서草書에 뛰어나 이왕二王(왕희지 왕휘지)에 견주었으니 《서품書品》에서는 그의 글씨를 중품中品으로 분류했다. 불학佛學에도 능통해 이 부문 《봉법요奉法要》라는 저술이 있어 지도림支道林을 비롯한 당시 승려들 사이에서는 “일시지준一時之俊”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전진 극강시대. 한반도 쪽 지도는 문제가 적지 않다. 

 

 

사현謝玄(343~388)은 字가 유도幼度라 진군陳郡 양하陽夏(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태강현太康縣) 사람이다. 동진東晉을 대표하는 명장名將으로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한 사혁謝奕의 아들이면서 태부太傅 사안謝安의 조카다. 

경국재략經國才略이 있어 군대를 잘 다스렸으며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의 부장部將을 지냈다. 태원太元 2년(377), 전진前秦의 공습 우려가 있어 건무장군建武將軍, 예주자사兗州刺史, 광릉상廣陵相, 도독강북제군사都督江北諸軍事가 되어 방어했다. 북쪽에서 넘어온 사람들 중에 요용지사驍勇之士를 모집해 “북부병北府兵”을 조직했다. 

태원太元 4년(379), 전진 군대의 전진을 격파해 관군장군冠軍將軍,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승진했다.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비수지역淝水之役이라고도 하는 비수지전淝水之戰이었다. 이 전쟁에 전봉도독前鋒都督을 맡아 부장部將 류뢰지劉牢之를 먼저 보내 부대를 이끌고서는 낙간洛澗을 야간 공습해 서전을 장식했다. 이를 시발로 맹공을 퍼부어 기세를 타고서는 대승을 끌어냈다. 

태원太元 9년(384), 중원中原 수복에 나서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섬서陝西 남부 등지를 회복했으며, 병으로 좌장군左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전임됐다. 

태원太元 13년(388), 병서病逝하니 이때 46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공로를 기려 거기장군車騎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고 “헌무獻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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