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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가사문학의 개창조, 정읍 불우헌 정극인 묘소

by taeshik.kim 2019.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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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서 오백미터 지점에 무성리 삼층석탑이 있고, 그걸 지나 농토 한가운데로 난 아스팔트 왕복 일차선을 따라 얕은 능선을 오르면 불후헌 정극인 묘소가 있다. 



문중에서 세웠는지, 아니면 지자체 작품이는 지모르겠지만, 안내판이 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우헌 정극인不憂軒丁克仁 선생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 , 다현(茶軒) . 다각(茶角)이고, 1401년(태종1) 경기도 광주(廣州) 두모포豆毛浦에서 출생하였고, 1429년(세종11) 생원시에 급제, 성균관에서 수학 중 1437년(세종 19) 척불斥佛상소로 인해 북방(北方)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 처가가 있는 태인(泰仁)으로 닉향하었다. 

서당을 세워 항리자제鄕里于弟)를 가르치면 중 1451년(문종 1) 일민 천거逸民薦舉로 6품의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에 올랐고, 1453년(단종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455년 전주부교수全州府敎授로 있을 때 단종이 찬탈당함에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왔다. 

1469년(예종 원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임용되고 곧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101 되었는데, 1470넌(성종 1) 치사致仕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1472년(성종3) 영달을 구하지 않고 항리자제를 가르친 공功으로 통정대부樋政大夫를 가자加資하고 관찰사에게 명하여 제때에 보살피도록 유서諭書를 내렸다.

1475년(성종6) 우리나라 최초 민간 주도의 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국가보물 1181호)을 제정하여 풍교風敎에 힘썼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賞春曲과 단가短歌의 불우헌가不憂軒歌, 그리고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不憂軒曲 등을 지어 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481년(성종 12) 서거하였고, 1630년(인조8)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고 예초판서겸지춘추관성균관사禮曹判書兼知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다. 


불후헌 묘는 후대 잦은 보수로 축조 당시 면모는 이미 멸실했다. 

석물은 대부분 현대기 신축이고 묘표墓表는 고색을 풍기나 조선후기를 넘지 못할 듯하다.

망주석 두 기는 오래된 듯하지만 이 역시 묘 축조 당시 것인지는 모르겠다. 

불후헌 묘 위쪽에 봉분 하나가 있는데 기록을 찾아봐야겠다.


묘소 아래는 그의 재실인 영모사가 있으나 붕괴 일보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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