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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빵점짜리 한국고고학사전 원고 교정

by taeshik.kim 2020.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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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전인가? 한국고고학사전의 실상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제공하는 한국고고학사전 표제 항목 중 편의상 그 첫 머리에 오른 다음 세 가지를 적출했다. 묻는다. 이게 사전인가? 100점 만점으로 매긴다. 가거도패총(김건수) : 40점 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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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에서 세 항목 기술을 골라 내가 생각하는 점수를 매겼으니, 개중 빵점짜리가 있다. 이 빵점짜리를 그 원고를 최대한 존중하는 선에서 내 나름대로 교정한다. 

 

 

가경동 4지구유적(淸州佳景洞4地區遺蹟)

설명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에 위치한다. 유적 일대는 해발 70~95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이 발달되었고, 해발 85m 내외의 능선 정상부에 해당하는 1구역에서 백제 토광묘 13기와 주거지 3기·저장수혈 7기 등과 함께 조선시대 토광묘와 회곽묘 18기가 조사되었다. 

백제 토광묘는 능선 정상부를 중심으로 주로 동쪽 사면에 분포하며, 장축이 모두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다. 삭평이 심하여 잔존 깊이가 대개 20~40㎝ 내외에 불과하다. 묘광 평면은 2.3~2.9 : 1 내외로 대개 장방형이지만 목곽이 사용된 8호와 같이 평면이 방형에 가까운 것도 있다. 관곽의 흔적은 5기에서만 확인되었는데, 묘광 면적이 4㎡ 내외로서 가장 큰 편에 해당하는 8·13호는 관이 별도로 존재하지만 나머지는 곽 내에 토기가 부장된 것으로 관 사용여부는 확실치 않다.

토기의 부장위치는 능선 중앙과 서편 사면에 위치한 8·12·13호의 경우 경사면 아래에서 보았을 때 우측 부장인데 비해 동남편 사면에 있는 1~3·6·9~11호 등은 좌측 부장되어 있어, 크게 보아 남쪽 부장의 공통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8호의 경우 관 내에 부장된 삼엽환두도의 위치로 보아 토기 부장부의 반대인 북쪽이 두향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부장품은 발치(남쪽)에 놓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토광묘군의 두향은 북침에 발치부장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또 8호에는 묘광 양 단벽에서 각각 20㎝ 안쪽에 너비 16~18㎝ 길이 5~6㎝ 가량의 곽받침대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곽 평면은 ‘ㅍ’자형이고 중앙에 관을 안치하였다. 

유물은 광구장경호와 파배·병·광구소호·주구부 토기와 철부·철겸·철착·도자 등의 공구류 등이 부분적으로 부장되어 있다. 8호에서는 삼엽환두대도와 연미형철모·1조선(條線)의 함과 인수가 있는 재갈이 공반되었고 3호는 철촉, 12호는 철촉·교구가 공반되어 무장적 성격을 보여준다. 대체로 4세기 말~5세기 중반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성정용)

참고문헌
청주 가경4지구유적Ⅰ(충북대학교박물관, 2002)

구분 유적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편)

 

 

 

충북대학교박물관과 대한주택공사가 펴낸 2002년 청주 가경동 4지구 유적 발굴보서서 1

 

 

 

교정한다. 강조하지만, 나한테 주어지면 이런 식으로 아예 쓰지도 않는다. 주어진 텍스트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음을 밝힌다. 

 

 

가경동 4지구 유적 淸州佳景洞4地區遺蹟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에서 발견됐다 해서 이리 부른다.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해발 70~95m 안팎인 구릉이 펼쳐진다. 능선 정상에서 가까운 해발 85m 지점에서 움무덤 13곳과 집터 3곳, 무엇인가 저장하기 위한 구덩이 7곳을 포함한 백제시대 사람 활동 흔적과 함께 움무덤과 석회를 쓴 곳을 합친 조선시대 무덤 18곳이 확인됐다.  

백제시대 움무덤은 능선 동쪽 비탈에서 발견되며, 모두 등고선 방향을 따라 구덩이를 길게 혹은 사각형으로 팠다. 시간이 흐르면서 흙이 많이 씻겨 내려가 확인된 무덤들은 깊이가 20~40㎝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관이나 나무덧널을 쓴 흔적은 다섯 곳에서만 확인되며, 나머지는 쓰지 않았거나 그런 흔적이 확실치 않다. 

공중에서 내려 볼 때 무덤 구덩은 길이 2.3~2.9미터에 너비 1미터 안팎인 긴네모꼴이지만, 나무덧널을 쓴 8호분처럼 정사각형에 가까운 것도 있다. 널 혹은 곽을 넣기 위해 판 구덩이 면적이 4㎡ 안팎으로, 이곳에서는 큰 편에 속하는 8·13호분은 널과 덧널을 같이 사용했지만, 나머지는 덧널은 확인되나, 널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8호 무덤은 널과 덧널을 어떻게 배치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이 무덤에서는 무덤 구덩이 양쪽 벽면에서 길이 각각 20㎝가 채 안되고, 너비는 16~18㎝에 길이 5~6㎝가량인 판자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덧널 받침대였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덧널은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 ‘ㅍ’자 모양이고 그 가운데다가 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껴묻거리로 흙그릇이 발견되는 지점은 8·12·13호분의 경우 능선 아래쪽에서 위로 올려본다 할 때 오른쪽인데 견주어 1~3·6·9~11호분 등은 왼쪽이다. 다만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확인되는 점은 같다. 

8호분을 볼 적에 덧널 안에서 드러난 칼 위치로 보아 그릇들이 발견된 지점 반대쪽인 북쪽으로 머리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껴묻거리는 시신의 남쪽 발치 지점에 놓은 셈이 된다. 이로써 본다면 이들 백제시대 무덤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발치 쪽에다가 그릇들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먼저 그릇류를 들 수 있으니, 모양에 따라 아가리가 넓은 크고 작은 항아리와 손잡이가 달린 잔, 병, 주둥이가 있는 그릇 등이 있다. 쇠붙이로는 도끼, 낫, 끌, 칼 등 공구류가 가끔 발견되기도 한다. 백제시대 이런 집단 무덤은 특정 집안 공동묘지다. 이로 볼 때 이곳에 묻힌 집단은 혹 대장장이 일에 종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8호 무덤의 경우 삼엽환두대도라 해서 이파리 세 개 모양인 고리 갖춤 큰칼이 제비꼬리모양 철모, 1조선(條線)의 함과 인수가 있는 재갈(??? 씨불 무슨 말인지 너는 아니????)과 함께 발견됐으며, 3호 무덤에서는 쇠화살촉이, 12호 무덤에서는 쇠화살촉과 띠고리가 함께 나왔다. 이로 본다면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군인 아니었을까?  

이들 무덤은 출토 유물이나 무덤 구조로 보아 4세기 말~5세기 중반 무렵에 만든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무덤 설명은 아예 없다!!!) 

 

 

 

충북대학교박물관과 대한주택공사가 펴낸 2004년 청주 가경동 4지구 유적 발굴보서서 2

 

 

 

참고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보고서 요약이 검출하거니와 

 

 

《청주 가경4지구 유적(Ⅰ)》, 차용걸, 노병식 외 2명, 2002, 충북대학교박물관

 
이번 조사결과 유적 청동기시대의 유물에서 시작하여 주로 백제시기와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중 가장 많은 유구가 백제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백제시기 유구의 매몰토에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무문토기편과 홍도의 파편이 있다는 것은 보다 지표에 얕게 형성되었던 청동기시대의 유구가 백제시기에 파괴되고 매몰 과정에서 표토에 노출되었던 것들이 매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시기의 유구는 이 좁은 지역에서 주거지, 저장혈, 무덤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유물에 있어서는 첫째로 청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백제시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고, 둘째로 심발형토기가 부장되지 않은 점, 셋째 평균 용량이 2,200cc의 양이부 혹은 장식 종파수가 붙은 큰잔들이 아마도 백제의 량기로 제작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지역은 결국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에 가장 활발한 문화활동이 있었으나, 통일신라로부터 조선 중엽까지는 거의 공백지대로 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시 마을이 형성되고 민묘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이런 중요한 지적들이 저 사전 항목에서는 모조리 누락했다. 

 

이는 결국 누구의 문제인가?

 

첫째 집필자 문제다. 둘째 교정편집진 문제다. 셋째, 발주처 문제다. 다 문제다. 저걸 오케이 사인을 놓은 이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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