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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새로운 미디어환경의 고고학

by taeshik.kim 201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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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 대왕릉 발굴현장 공개


언론계에 26년째 몸담은 필자 역시 언론 환경이 어찌 돌아가는지 가늠이 힘들다. 그만큼 변화는 빨라, 얼마 전까지 인터넷 시대라 하더니, 이내 모바일 시대로 돌아섰고, 그런가 하더니 SNS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페이스북 유투브가 대세를 장악하는가 싶더니, 2018년 10월 현재는 유투브가 독패를 구가한다.

하지만 이 유투브 왕국도 불안불안한 모양이다. 넷플릭스인지 하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20년 전, 10년 전만 해도 언론계 화두 중 하나는 전문기자제 정착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그 제도의 당위성에는 누구나 동감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시행된 언론사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단 한 곳도 없다 단언해도 좋다.

기자가 본인이 맡은 분야에 대해 고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분야가 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시대다.

그런 점에서 유독 문화재 혹은 고고학만이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언론이 커버하는 다양한 분야 중에서도 문화재 혹은 고고학이 다른 분야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더욱 고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도 변할 수 없다.

이런 특성은 언론계 내부에서는 기자들로 하여금 문화재 담당을 기피하게 만드는 가장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고고학 혹은 민속학 주체로서의 관람객


하지만 여타 제반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고학 역시 이제는 시민사회 품으로 성큼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른바 ‘역사덕후’라 해서, 열정으로 무장한 역사 혹은 고고학 애호가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고고학 자체로만 보면 영역과 시장의 확대라는 점에서 분명히 고무적인 현상이며, 그에 따라 이 업계에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활약할 여지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저변확대가 반드시 그런 데로만 물길을 돌리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전업적 학문은 그 태생 혹은 그 권위 유지를 위해 필연적으로 그들만의 철옹성을 구축하려는 욕망이 있다.

우리 분야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그 콧대를 자존심이라고도 추켜세울 수 있겠지만, 실상 그 속내를 뜯어보면, 내 영역 내 밥자리 지키기에 다름이 아님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철옹성 사수에 나선 고고학은 실상 뜯어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이상한 용어로써 시민사회를 겁주려 한다. 무덤이라 하면 될 것을 고분이라 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지, 분류라는 이름으로 적석목곽분이며, 횡혈식석실분이라는 요상한 이름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고고학을 위한 명명인가 아니면 그네들 밥그릇 지키기 차원인가는 냉혹한 성찰을 요구한다. 고고학계와 시민사회, 그 가교를 놓는 자리에서 언론은 여전히 중요성을 지닌다.

이 가교 역할을 언론을 해야 하며, 이 가교란 간단히 말해 소통이다. 소통이라는 물길을 터주는 일이다. 


고고학 주체의 혼효가 일어나는 박물관. 사진은 국립춘천박물관.



이를 위해 언론이건 고고학이건, 이제는 ‘고고학을 한다(doing archaeology)’는 말 자체도 전복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경우 무엇을 고고학이라 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 정리도 새롭게 해야 한다.

땅을 파서 유구·유적을 발굴하고 그것을 분류하고 실측하며, 그것을 토대로 지구촌 역사와 인류 역사를 밝히며, 그런 결과를 꼭 논문으로 작성한다 해서 그것만을 고고학이라 할 것인가? 이는 어쩌면 오만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고고학은 일방적인 군림의 학문이었다. 고고학을 하는 고고학자라는 그룹이 있어, 그들이 언제나 그 학문을 독점하며, 기타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훈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배와 복종의 이원적 지배질서를 강고하게 구축했다.

필자는 이에서 주체의 균등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고고학을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고고학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일체의 행위 자체를 고고학으로 새롭게 정의하며, 그런 일에 종사하거나 관여하는 일체 행위자도 고고학자로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본다.

박물관 가서 고고학도나 미술사학도한테서 그 설명을 듣는 메카니즘 역시 이런 발상 전환에 따라 그것을 가르치는 행위도 고고학을 하는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소비하는 일 역시 고고학을 하는 행위인 것이다.

고고학 문화재 현장을 가서 즐기며 사진을 찍는 일도 당연히 고고학을 하는 주체적 행위다. 예컨대 내가 해당 경관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드론을 띄워 동영상으로 담는 행위 역시 고고학을 하는 행위 아니라고 누가 반론하겠는가?

고고학은 이른바 고고학자만이 하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야 한다.

대중고고학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겠지만, 필자는 그것을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사고에서의 해방이라고 본다.

누구나 고고학을 하는 행위 주체자로서의 변화를 말한다고 본다. 


고고학 주체로서의 관람. 진시황제 병마용갱


이런 발상 전환은 그것을 뉴스화하는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라 본다. 돌이켜 보면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으로 대표하는 이른바 인터넷 언론이 처음 국내에 등장할 때 그들이 내세운 구호는 “누구나 기자다”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막상 실행되기 시작했을 적에 적지 않은 우려가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것이 결국 지금은 블로그를 비롯한 다양한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요컨대 지금은 1인 언론시대가 온 것이다. SNS의 등장과 확산은 그런 흐름을 가속화하는 중이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주요 고고학 소식 역시 각종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까지 되는 시대다. 발굴 현장 공개 장면은 전통적 방송 언론매체 힘을 빌리지 않더래도 유튜브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우리는 접하는 시대를 산다. 조만간 발굴 현장 자체도 생중계가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본다.

학술대회 현장도 마찬가지다. 이런 새로운 플랫폼의 도입은 무엇보다 시공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요즘 웬만한 권위의 대규모 국제 고고학 관련 학술대회는 유투브 생중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에 따라 지금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만히 앉아 유럽 어느 지역에서 열리는 고고학 학술대회 발표문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접하는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이런 시대에 각종 암호와 난수표로 점철하는 학문이 살아남을 길은 없다. 미디어 환경 급변은 이른바 상아탑 고고학을 곤혹스럽게 만들지는 몰라도, 고고학 저변은 역사상 유례없는 시장 확대가 이뤄지는 중이다. 


*** 이상은 근자 발간된 한국대중고고학회 엮음, 《한국대중고고학개론》(주류성, 2018. 10)에 투고한 졸고 <고고학과 언론> 챕터 중 그 마지막 6장 '새로운 미디어 환경의 고고학' 전부를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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