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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서울올림픽이 부른 통금해제

by taeshik.kim 2020.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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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포착] 해방 37년만에 돌려받은 '심야의 자유'

송고시간 | 2020-01-11 08:00

1982년 1월 5일 자정 기해 통행금지 해제




순간포착 이번 호에서는 사진 자체보다 사건 자체에 중점을 둬 봤다. 시점을 고려해 역대 이 무렵 일어난 사건 중에 1982년 1월 5일 자정을 기점으로 시행된 '통행금지해제'를 골랐다. 지금은 상상도 어렵겠지만, 불과 38년전까지 우리는 일정한 시점을 넘기면 통행 자체를 할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사진은 통금 해제 첫날 새벽 서울 도심이다. '통행금지 해제'란 제목의 사진에는 '통행금지가 1월 5일 자정을 기점으로 해제되자 시민들이 자정이 지난 뒤에도 시청 뒷골목에 흥청거리고 있다. 1982.1.6 (본사자료)'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앞 사진에는 '통금이 37년만에 해제 전 날밤 경찰이 통금 신분증을 확인'이라는 제목 아래 "37년만에 통금이 해제되기 전 날밤 경찰이 통금에 위반한 운전기사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다. 1982.1.4


라는 설명이 붙었다. 저때는 초상권 개념이 거의 희박할 때라, 검문당하는 운전사도 전면을 노출하고 우유도 뿌리지 않았다. 표정으로 보아 연출이라는 느낌이 강한 사진이다. 




'37년만에 통금 해제'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통금이 37년만에 해제되자  한 시민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려 경찰이 연행해 가고있다. 1982.1.6"이라 했다. 사진 발행 시점을 보니, 통금해제된 첫날 밤 서울역 풍광이다. 이 사진 역시 초상권 개념이 없다. 배경을 보니 서울역 광장이라, 기자가 부러 그 전면 시계를 넣었으니, 새벽 1시25분이다. 


이걸 발행한 의도는 짐작하는 대로다. 이젠 열두시 넘어 거리를 활보한다 해도 그 자체가 범법 행위를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진에는 "통금이 37년만에 해제되자 시청 뒷 골목에는 포장마차가 등장하였다. 1982.1.6"이라 했으니, 역시 대응이 빠른 영업 자세다. 이 분 성공했으려나? 암튼 이로 볼때 포장마차는 통금해제가 초래한 새로운 문화 아닌가 한다. 



'통금 해제후 바뀐 주유소'라는 이 사진엔 "통금 해제이후 철야 영업을 하는 영업용 택시 등을 위해 주유소도 24시간 문을 열고있다. 1992.6.24"라 했는데 우리 DB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하다. 1982년 6월, 혹은 1월 24일 아닌가 한다. 




이 사진엔 "통금이 풀리고 첫 밤을 지낸 서울시 모습. 본사자료 1982.3.1"이라 했는데, 이 역시 사진 촬영시점이 훗날 DB 구축과정에서 착란이 일어난 듯하다. 1월 6일일 것이다. 




이 사진은 '야간통행금지해제-무교동의 밤'이라는 제목 아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서울 무교동에서 시민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했는데, 통금 해제 직후 풍광일 것이다. 무교동은 당시 언론인 공무원이 대포 한 잔 하는 곳이었다. 


이 통금해제가 지닌 역사적 의의가 저 기사에는 다음 대목이 집적했으니 


통금 해제는 밤 문화 활성화로 이어졌다. 당시 연합통신(연합뉴스 전신) 보도에 따르면 서울극장이 상영 중이던 '애마부인'의 심야상영을 3월 20일 시작한 이후 서울 시내 14개 개봉관 가운데 9개 관이 영화를 심야에 상영했다. 버스와 지하철은 연장 운행하고, 철야로 운영하는 가게와 술집이 등장하며 술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애마부인'이 대표하는 심야 관능영화가 쏟아져 나온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내가 이 대목을 접하고는 다음호 순간포착은 '애마부인'으로 골라 보라 했다. 


이 통금해제도 그렇고, 이 무렵 저런 통제장치가 연이어 빗장을 풀었으니, 교복 두발 자율화도 있었으니, 이런 것들이 이젠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고 해도, 그 대세를 당시 폭압적인 군사정부가 고려나 했을까? 관심밖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강고한 통제사회가 서서히 빗장을 연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올림픽 개최 확정이 지닌 힘이었다. 


서울올림픽...이거 막연히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것이 한국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실로 핵폭탄급이었다. 


이 통행금지는 나로서는 이렇다 할 기억이 없는 사건이다. 나는 그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곳을 산 까닭이다. 어차피 고향이라 해 봐야 그 농촌에 통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6볼트짜리 찡군 후래시 들고 논두렁을 배회할 때니, 순사와 지서가 있기는 했지만, 면사무소 소재지는 20리나 떨어진 곳이라, 밤엔 어차피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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