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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스핀오프] 아웃브레이크: 조선을 공포로 몰아 넣은 전염병 (4)

by 초야잠필 202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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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서울의대 생물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참 한 주가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한 두번 건너뛰었다고 생각해 지난 회를 찾아보니 3월 초.. 한달 가까이 벌써 지나가 버렸는데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다. 코로나바이러스에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도 유례없는 온라인 강의 준비에 여념이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책 하나를 편집하느라 눈코 뜰새가 없다. 백수과로사라더니 정작 감염병창궐로 이동은 줄어들었지만 일은 줄지 않은 것 같다. 미래사회의 근무모습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걸까. 


아무튼 연재를 계속 이어가겠다. 이전 기억이 잘 안나시는 분들은 아래 연재를 참고하시길-. 


연재 3회


연재 2회


연재 1회


이렇게 다양한 (?) 방법을 총동원하여 조선사회는 나름의 방역작업을 했지만 예상대로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조선사회의 비극은 이런 환란이 있을 때마다 나름 사회의 구성원이 이를 막기위해 총력전을 폈지만 대응 수단이라는것이 마땅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전통사회처럼 조선사회 역시 거대한 전염병의 공격에 무력했다. 


이렇게 갖은 수단을 다 써 봐도 안 되는 상황에 닥치게 되면 결국 종교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조선왕조 역시 전염병이 닥칠 때마다 최후의 수단으로 의지하는 수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여제厲祭라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사회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인 사회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사회이므로 온갖 미신이 횡행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은 면이 있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에 내재된 속성인 합리주의의 발로라고 볼 수 있는데, 논어의 아래 구절을 보면 그런 경향이 확연하다. 


[1] 季路問事鬼神 子曰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선진편)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물으니 사람을 섬기는것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 하였고, 감히 죽음에 대해 물으니 살아가는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2]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팔일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라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기나라 예는 밝힐수 없다. 은나라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없지만 송나라 예는 밝힐 수 없다. 문헌이 없어서 그렇도다. 문헌이 있다면 나는 능히 기나라, 송나라 예도 밝힐수 있노라. 


공자의 위대함은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체와 이를 운용하는 이들의 심리에 합리성을 부여했다는데 있다. (Copyright=DHSHIN)


이 두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음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단지 선진문헌에 나와있는 소위 고례古禮에 대해서 만큼은 예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한번 썼던 것 같지만 조선사회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옛 성인이 정해 놓으셨다는 "고례"를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조선시대 쯤 되면 그 성인이 정해놓았다는 "고례"도 유교 문헌을 살펴봐야 디테일이 떨어지는 터라 구체적인 내용에 이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들어오면 향음례, 향사례 등 소위 고례가 많이 복원되어 행해졌는데 이 의례들의 구체적인 정황은 사실 문헌을 상고해도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들이다.  


어사례도. 임금이 참여한 대사례를 기록한 의궤 그림. 조선시대의 의궤란 장구한 노력을 거쳐 간신히 복원된 "고례"가 망각으로 다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열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실제로 과거에 어떻게 행했는지 알 수 없는 "고례"가 중국에서 그럭저럭 복원되어 시행되고 있는 경우에는 이를 도입하는 경우이다. 이처럼 문헌에 의하지 않고 전거가 뚜렷하지 않은 전례를 "시왕지례時王之禮"라 하는데 이런 경우 비록 조선이건 명나라건 국가에서 결정하여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고 해도 이런 시왕지례 자체가 유학자들이 비판을 할 수 없는 절대선은 아니었다. 


또 하나는 그야말로 맨바닥에서, 성인이 남긴 것이 분명한 유교 1차텍스트를 직면하면서 그로부터 고례를 복원해 내는것이다. 이런 시도에서는 마치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쯔빙글리, 캘빈에서 볼수 있는 원전에 직면하는 극렬성까지도 엿보이는 것이다. 때로는 어거지에 가깝고 약간이라도 전거가 있는 경우에는 끌어다 붙여 누더기 꼴의 복원이 되기 십상이었겠지만 어쨌건 "문헌이 가능하다면 고례를 복원할수 있다"는 공자님 말씀에 이만큼 충실한 것도 없었겠다. 


조선의 경우 국초에 정해 놓은 많은 의례-전례들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에 의해 수정되거나 뒤집히는 경우를 보는데, 결국 古禮를 현실세계에 관철시키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국가의 권력에 의한 실행유무가 아니라 분명한 전거에 의거한 합리성-. 인용 가능한 유교 전승에 따라 증명이 가능한가-. 그것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갈수록 조선의 사대부들은 첫번째 방식이 아니라 두번째 방식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조선후기를 수 놓은 예송도 모두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능 한 부분이 있다. 예송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공리공론-어거지가 아니다. 예송에 뛰어든 주장은 모두 리퍼런스가 있다. 전거할 문헌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수 천년전 옛 고례를 복원 해 낼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리퍼런스끼리도 서로 충돌하며 어떤것은 디테일이 떨어져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종묘야 말로 조선왕조가 추구해 온 고례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COPYRIGHT=DHSHIN)


이 때문에 설사 중국에서 도입된 새로운 의례라 해도 모두 조선 유학자들의 검토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래 글에서 이런 경향을 잘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 출병나온 명나라 장수들이 관왕묘를 지어 참배하고자 하고 조선왕에게도 치제하게 하니 이에 대한 조선조정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관왕묘에 행례하는 일에 대해 널리 상고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상고하였으나 옛날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낸 유(類)에서는 준거할 만한 것이 없었고, 오직 송조(宋祖) 개보(開寶) 3년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대 공신(功臣)과 열사(烈士)의 등급을 품제(品第)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관우(關羽)도 그 속에 들어 있으니, 소위 관왕묘라는 것은 명나라 이전에 이미 제사지낸 일이 있습니다. 중국 장수들은 매우 존경하여 사맹삭(四孟朔)과 세모(歲暮) 및 그의 생신에는 모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한 사실이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증사신기편(增祀神祇篇)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경리를 비롯한 제공(諸公)들이 관왕묘에 나아가 분향하고 또 상께서도 예식을 행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로 말하면 이런 제사는 없었고 엇비슷하여 모방할 만한 규칙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상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응당 행해야 할 제사가 아닌데 경솔하게 조처하면 올바른 제사의 의식에 합당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번역에 의함)


이 글에서도 보듯이 조선이 관왕에 대한 제사를 채택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명나라가 이 제사를 국가사전에 편입하였는가 아닌가 하는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조선이나 명나라나 전거가 확실하지 않으면 시왕지례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관왕묘는 결국 이후에 어물쩍 조선왕조가 관리하는 제사 안에 편입되었으니 우리가 보는 동묘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역사서를 보면 이러한 "은근슬쩍"의 이유는 명나라가 제사로 채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후세의 조선왕들이 관우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관왕묘는 적절한 시점에 조선의 국가관리 제사에서 탈락했을 듯 하다. 



동묘. 관우가 모셔진 이 사우는 유교전례에는 포함되지 않은 변칙적인 것이다. 아마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재난과 조선왕이 관우의 팬이 되어버렸다는 의외의 돌발 사건이 없었다면 관우숭배는 공식적 국가전례에서 종내는 탈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COPYRIGHT=DHSHIN)


다시 중종 연간의 평안도 전염병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격렬한 전염병 확산으로 일개 도가 절단이 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면 누구든 절대자에 매달릴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 인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재난의 원인에 대한 합리적(?) 추측의 하나라고 할-. 원귀의 저주. 이것도 내놓고 말은 못해도 아마 쉽게 떠올렸으리라.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국면에서 모두 느꼈겠지만 수많은 사람이 일시에 병들고 죽어나가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도 공포, 마녀사냥, 종교에 대한 의존 등 다양한 심리적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인류사회의 발달 정도와는 무관하게 비슷한 상황이라면 언제 어느 때라도 다시 재현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현재 근대적 사고와 고도의 물질 문명을 누리고 있다고 해서 전염병이 창궐할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중세 유럽인 보다 크게 다를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병들고 쓰러지는 전염병 대유행의 국면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은 사회의 진화와 무관하게 인류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아키타입을 건드리는 측면이 있다. 


"평안도의 여역癘疫에 관한 일은, 신들이 조보(朝報)를 보고 매우 놀랐으나, 그치게 할 방도를 생각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문종조(文宗朝)에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치제(致祭)한 뒤에 병이 과연 그쳤으나,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황해도 극성(棘城)에서 홍건적(紅巾賊) 이 많이 패망(敗亡)하였는데, 이 때문에 황주(黃州)·봉산(鳳山) 등에서 사람이 많이 병들어 죽었다 하여 문종(文宗)께서 제문을 친히 지어 치제하였습니다. 이번 평안도의 병은 군졸이 패망하기 때문이 아니고 여역이 치성하여 각 고을에 두루 번진 것이니, 신들은 제사를 베푸는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번역에 의함)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2월 9일 기해 1번째기사를 보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이를 통해 1524년 당시 조선 조정을 지키던 사람들의 역병에 대한 의식을 슬쩍 엿볼수 있다. 


평안도의 여역이 창궐하여 갖은 방법을 다 써도 그치지 않으니 원귀에 대한 제사를 생각해 볼까... 하는 유혹이 있으나 유교적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원귀와 연결시키는 것은 유학자-사대부의 입장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힘들게 유지되던 합리성도 무섭게 몰아치는 전염병 앞에는 속수무책-. 조선왕실은 원귀를 달래는 여제厲祭를 최후의 수단으로 의지하여 치르게 된다. (계속)


필자 주: 여제는 물론 조선왕조 국초부터 존재하였으며 문헌적 전거도 선진시대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이를 전염병 국면에서 원귀를 달래는 용도로 쓰는 취지는 조선시대 중 후기로 올수록 점점 강화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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