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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신라시절 경주선 침대 썼다"

by taeshik.kim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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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days of Silla, beds were used instead of ondol. As a result of active archaeological excavations, ondol was not found in the building sites from the Silla period.

 

신라시대에는 온돌이 거의 발견되지 아니해서, 과연 신라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난방 문제를 해결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이런 궁금증과 관련해 제출된 논문 중에서 수원대 양정석 교수 논고는 지남철 같은 구실을 한다. 이 논문 출처를 물어오는 분이 가끔 있어, 당시 이를 정리한 2006년 내 기사를 전재하니 참고바란다. 

 

 

침대. 신라인들은 이런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2006.11.29 06:00:23
<"신라인은 온돌 대신 침대 사용">
양정석 교수 삼국사기 '옥사' 분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온돌을 가리켜 흔히 우리 민족의 독창적이면서도 독자적인 발명품이라고 하지만 한반도 남부지방에 이르기까지 온돌 사용이 전국적으로 일반화한 것은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온돌의 보편화는 곧 산림 황폐화 문제와 직결되는데 그 시점은 대체로 18세기로 본다.

 

실제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온돌 유적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드넓은 황룡사지, 미탄사지를 팠는데 그 어디에서도 온돌 흔적은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 이은석 학예연구관은 "황룡사지는 물론이고 그 바로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대규모 왕경 유적, 동궁(東宮)이 있던 월성 안압지 등지에서도 온돌은 없었다"고 말했다.

 

온돌을 쓰지 않았다면 신라인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주거환경을 꾸몄을까?

 

양정석 수원대 교수는 신라인의 신분별 각종 건축 규제 사항을 담고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2의 '옥사'(屋舍) 관련 기록들을 분석한 결과 신라인들은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침대를 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연구성과는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 경주문화원, 동국대 국사학과가 30일 오후 경주 현대호텔에서 공동 주최하는 제28회 신라문화제 학술회의를 통해 발표된다.

 

양 교수는 '왕경인의 주거공간 : 삼국사기 옥사 조(條)와 왕경(王京) 유적의 관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왕족을 제외한 신라의 최고 신분인 진골(眞骨)과 그 다음 신분인 육두품(六頭品) 계층에 대한 건축 관련 규제 항목에서 상(床), 즉 침상에 관한 기술이 보이고 있음을 주목했다.

 

황룡사 남쪽 미탄사지도 온돌은 없다. 

 

이에 의하면 진골은 침상을 대모나 침향목으로 꾸미지 못하며(床不飾玳瑁침香), 육두품은 대모나 자단, 침향, 그리고 회양목을 침상 장식으로 쓰지 못했다(床不得飾玳瑁紫檀침香黃楊).

 

양 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은 방바닥에 직접 앉거나 그곳에서 잠자지 않았으며 침대나 기대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건물 바닥에는 널마루나 온돌 등을 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또한 신분별 건축 규제 사항을 담은 삼국사기 옥사 관련 기록이 신라 흥덕왕 9년(834)에 공포된 법령에 기초를 둔 것임은 의심할 수 없으나, "사실상 부분적인 실행에 그치거나 실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미탄사지. 온돌은 역시나 없다. 

 

즉 흥덕왕으로서는 그 직전에 지진이 일어나고, 혹독한 가뭄과 연이은 기근, 그리고 도적과 전염병의 창궐 등과 같은 국가적 위기 국면에 직면해 검소함을 강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때마침 당나라 문종(文宗) 태화(太和) 6년(831)에 발효된 검박령(儉朴令)을 모델로 삼아 들고 나온 카드가 각 신분별 옥사나 거기(車騎. 수레), 기용(器用) 등의 사치 규제 법률이었다는 것이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밖에 ▲ 왕경인(王京人)의 의(衣)생활(고부자) ▲ 신라인의 놀이 형태에 관한 고찰(김성혜) ▲ 목간으로 본 신라왕경인의 문자생활(윤선태)과 같은 발표가 이어진다.

 

***

 

신라인들이 적어도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침대 생활을 했다는 저 양 선생 연구성과는 중대하다. 

 

이와 관련해 신라고고학 전공인 이은석 선생은 "지금의 일본 사람들처럼 다다미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부소산성 통일신라유적에서 겨우 페치카형 온돌이 발견되는 정도일 뿐이며, 신라인들은 기본적으로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답변 역시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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