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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왜 김양도金良圖인가?

by taeshik.kim 2021.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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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도라는 인물은 현재까지 전연 주목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 같은 나당 전장에서 활약한 다른 인물들에 견주어서도 그에게 우리는 이렇다 할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언급만 가했을 뿐이다.


화랑세기의 김양도



하기야 《삼국사기》조차 그를 문장가로 꼽으면서도, 관련 자료 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그를 위한 별도의 전기를 세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정리와 고찰을 통해 우리는 김양도가

첫째, 신라의 일통삼한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전쟁영웅이고

둘째, 그는 문장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으며

셋째, 무엇보다 팔망미인으로서 조각가이며 화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적출한다.

더불어 이런 그를 당이 장안의 옥에다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은 자신들에게 대드는 신라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이었다.


화랑세기 양도 전 첫머리



사죄사절단 일원으로 파견된 김양도가 옥사했다는 소식에 신라는 당을 향한 무력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사신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당이 이런 극약처방을 왜 했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신라가 모를 리 없었다.

이를 기화로 신라는 한반도에 주둔한 당군에 대한 맹렬한 군사 투쟁에 나선다. 그리하여 어중간에 들고낢이 있기는 했지만 대략 3년 만에 마침내 신라는 그들을 궤멸하고 진정한 일통삼한을 이룩했다.

김양도의 죽음은 신라와 당 사이의 국제관계 규율을 깨뜨리는 신호탄이었고, 나아가 그것은 그 재편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그의 사후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을 채 누리지는 못했다. 그가 옥사한지 11년 뒤에 발생한 흠돌의 난에 그의 아들딸이 연루되어 역적으로 몰리고, 사찰 노비가 되는 굴욕을 맞보았다.

종래에는 이들이 절의 노비가 된 일을 사신捨身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에서 말미암아 이들이 자발적으로 사문에 귀의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그것은 자발이 아니라 죄수로서의 강등이고 강제 노역이었다.

(2016. 7. 10)

***

이에 대해 김창겸 형은 아래와 같은 연구성과를 참조하라 했다.

김양도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기백 선생이 김양도와 흥륜사와 아미타신앙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논문이 있었지? 대한민국 학술원 논문집 19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보시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국편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에 실린 '사원노비의 기원'에 보면 김양도 딸들이 노비가 된 것에 대한 해석이 있으나. 참고하십시오.


보다시피 이는 김양도 자체에 대한 탐구는 아니며 변죽만 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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