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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요절한 딸을 향한 애끓는 영조의 한탄

by taeshik.kim 2019.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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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협和協은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와 그의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 소생이다. 계축년, 1733년 3월 7일 궁에서 태어난 화협은  11살에 영성위 신광수申光綏한테 시집갔다가 임신년, 1752년 11월 27일에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으니, 이제 겨우 스무살이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딸을 위한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 묘지명은 땅속에 묻어버리는 까닭이라 생각했음인지, 이곳에다가 필설을 토로하며 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제왕은 자고로 자기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하지만, 영조는 격정적이었다. 여기 영조가 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피로 쓴 애도문이 있다. 



[崇禎三癸酉二月二十九日]

[御製和協翁主墓誌 墓在金谷平丘村]


앞면


第七女和協卽暎嬪所生也. 癸丑三月初七日, 生于大內. 己未封爵, 十一歲下嫁永城尉申光綏, 卽判書晩之子也. 丁卯秋七月出閤, 壬申十一月二十七日, 逝于大寺洞第. 氣品從容淸秀, 事親以誠, 事舅若一. 雖處於闕中波蕩之中, 自幼至長, 湛然靜然, 無少間焉. 若不聞焉, 若不睹焉, 卽和協之性品也. 不然, 何以御下, 何以齊衆? 噫! 當時爲予之誠, 雖不能記, 去冬二十五日, 特爲臨視也. 聞予之來, 命左右, 而備饌待予, 令侍者, 而探問來予. 嗚呼! 其時奚能爲此, 而因恒日爲予之心也. 吁嗟! 其日事已末, 若惟待視終, 氣忽昏眩, 難以堪焉. 


嗟歎自謂曰, “其將欺我, 其將欺我.” 入視而謂曰, “予今入闕, 予今入闕.” 若是者三, 昏昏涔涔, 漠然無應, 故飮涕而回. 翌朝聞醫所傳, 其後省覺謂其侍者曰, ‘何弗覺余奏以安回云.’ 聞此弗覺淚下被面, 聞其訃來臨, 事已莫追. 嗚呼! 此懷何以記焉? 翌年正月二十二日, 葬于楊州金谷面庚向原, 而謂其子枝, 何忍記焉? 尤爲深愴者, 申門只有乳童, 弗卽立後也. 心思索漠, 記雖草草, 比諸文具, 庶可慰靈. 其錄一行, 淚下十行. 嗚呼哀哉! 嗚呼哀哉! 




[1753년 2월 29일]

[임금이 화협옹주의 묘지문을 지음. 묘는 금곡 평구촌에 있음]            


일곱 번째 딸인 화협은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소생이다. 계축년(1733) 3월 7일 대내(大內)에서 태어났다. 기미년(1739)에 봉작되고 11세에 영성위 신광수(申光綏)에게 시집가니, 그는 곧 판서 신만(申晩)의 아들이다. 정묘년(1747) 가을 7월에 출합(出閤)하고, 임신년(1752) 11월 27일에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서거하였다. 기품은 침착하고 맑았으며 어버이 모시기를 정성으로 하고 시아버지 모시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비록 궐내가 평탄치 못한 때에 처하여서도,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담박하고도 고요하여 조금도 간여하는 바가 없었다.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보지 못한 듯이 한 것이 곧 화협의 성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어찌 뭇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었겠는가? 




아! 당시 나를 위했던 정성을 비록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작년 겨울 25일 특별히 화협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좌우에 음식을 갖추어 나를 대접하라고 명하고는 시자(侍者)로 하여금 내가 왔는지 물었다. 아! 그때 어찌 이처럼 하여 평소 나를 위한 마음에 인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아! 그 날 일을 마치자 화협은 마치 시종(視終: 임종)을 기다리는 듯하여 기운이 갑자기 어지러워하며 감당하지 못하였다. 탄식하며 스스로 말하길, “아마도 나를 속이는 것이로다. 아마도 나를 속이는 것이로다.”라고 하고는 그녀를 보러 들어가서 “나는 지금 입궐하겠노라. 나는 지금 입궐하겠노라.”라고 하였다. 이처럼 세 번을 하였는데도 적막하고 잠잠할 뿐 아무런 응답이 없기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어의(御醫)에게 전해 들으니, 그 후 깨어나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어찌 나를 깨워 편히 돌아가셨는지 여쭙도록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으며, 부음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일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아! 이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 기록하겠는가. 이듬해 정월 22일 양주 금곡면 경향원(庚向原)에 묻었는데, 그 자손을 어찌 차마 기록하겠는가. 더욱 깊이 슬픈 일은, 신씨(申氏) 집안에갓난아기만이 있어 곧장 후사로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사가 삭막하여 비록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나 몇몇 문구(文具)를 나란히 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한다. 한 줄 기록하는데 눈물 열 줄기가 흘러내린다. 아, 슬프구나. 아, 슬프구나!   



작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 관련 작은 전시 코너가 마련됐다. 저들 묘지명 자료는 그에서 전시 중이다. 원문 탈초와 번역은 박물관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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