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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원광(圓光)

by taeshik.kim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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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신라 고승이다. 진평왕 11년(589) 중국 진(陳)나라로 유학 갔다가 22년(600) 귀국했다. 생몰년은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평왕 : 11년(589) 봄 3월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진나라에 들어갔다.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서 민가 30,360호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고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그들을 진휼하였다. 22년(600) 고승 원광이 조빙사(朝聘使)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돌아왔다. 30년(608) 왕이 고구려가 자주 강역을 침략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원광에게 명하여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니, 원광이 말하였다.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나, 저[貧道]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에 [글을] 지어서 아뢰었다. 2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침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에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35년(613) 봄에 가물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이르자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었는데, 원광 등의 법사(法師)를 맞이하여 불경을 강설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5(열전 제5) 귀산 열전 :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이 어렸을 적에 같은 부(部)의 사람 추항(=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들이 학문이 있고 덕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양하지 않으면 아마 치욕을 자초할지 모르겠다. 어찌 어진이에게 나아가서 도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에 나아가 옷자락을 걷어 잡고[衣] 말하기를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을 삼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였다.“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할 것,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할 것,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할 것, 넷째는 전쟁에 다다라서는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만 말씀하신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사(師)가 말하였다.“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안되니, 말, 소, 닭, 개를 말하며,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꼭 필요한 것만 죽이고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다. 이것은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명을 실추시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진평왕 건복(建福) 19년 임술(진평왕 24년: 602)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阿莫城)<막(莫)자는 모(暮)로도 썼다.>을 포위하니, 왕이 장군 파진간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 급간 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함께 소감직(少監職)으로 전선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가로 물러가 군대를 숨겨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올 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 갈고리로 [무은을] 잡아당겨 떨어뜨리었다. 귀산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다달아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며 적 수십 인을 격살하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태워 보낸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모든 군사가 [이것을] 보고 용감히 공격하였다. 적의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도 온몸에 칼을 맞아 중로(中路)에서 죽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나가 통곡하고 예(禮)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귀산에게는 관등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大舍)를 추증하였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는 말이다.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중 원광(圓光)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다.  본래 삼한(三韓), 즉 변한(卞韓)·진한(辰韓)·마한(馬韓)에 살았으니,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아 조상의 풍습(風習)이 멀리 계승되었다.  그는 도량(道量)이 넓고 컸으며, 글을 즐겨 읽어 현유(玄儒)를 두루 공부하고 자사(子史)도 연구하여 글 잘한다는 이름을 삼한(三韓)에 떨쳤다.  그러나 넓고 풍부한 지식은 오히려 중국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친척과 벗들을 작별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가니, 당시는 진(陳)나라 때로서 문명(文明)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거기에서 전에 의심나던 일을 묻고 도(道)를 들어서 뜻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엄(莊嚴) 민공(旻公)의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상의 모든 전적(典籍)을 읽었기 때문에 이치를 연구하는 데는 신(神)이라고 했는데 불교(佛敎)의 뜻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읽고 있던 것은 마치 썩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명교(名敎)를 헛되이 찾은 것이 생애(生涯)에 있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에 진(陳)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도법(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령(勅令)을 내려 이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이 되어 이내 계(戒)를 갖추어 받고 두루 강의하는 곳을 찾아서 좋은 도리를 다 배웠으며, 미묘(微妙)한 말을 터득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실(成實)>의 열반(涅槃)을 얻어 마음 속에 간직해 두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해 찾았다.  끝으로 또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에 올라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르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으니 중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林泉)에 모여들었다.  또 <사함(四含)>을 종합해 읽어 그 공효(功效)가 팔정(八定)에 흐르니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어그러진 것이 없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몹시도 맞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人事)를 아주 끊고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생각을 청소(靑소)에 두고 길이 속세(俗世)를 하직했다.이때 한 신사(信士)가 있어 산 밑에 살고 있더니, 원광(圓光)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지만 이를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드디어 그 뜻을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모두 해석이 뛰어나고 통철하며 가문(嘉問)을 전해 옮겨서 아름다운 말과 뜻으로 엮어 나가니, 듣는 자가 매우 기뻐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다.이로부터 예전의 법에 따라 남을 인도하고 교화(敎化)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양 법륜(法輪)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을 불법(佛法)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이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의 통전(通傳)이지만 도에 젖어서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명망(名望)이 널리 흘러서 영표(嶺表)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자가 마치 고기 비늘처럼 잇달았다.  이때는 마침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여서 그 위엄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쳤다.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해서 수(隋)나라 군사가 양도(揚都)에까지 들어가니 원광은 드디어 난병(亂兵)에게 잡혀서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수의 대장(大將)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으니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되어 장차 죽음을 당하려 하고 있다.  대장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보냈으니, 그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영험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학문이 오월(吳越)을 통달했기 때문에 문득 중국 북쪽 지방인 주(周)와 진(秦)의 문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開皇) 9년(589)에 수나라 서울에 유학(遊學)했다.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서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言)을 받들어 간직하여 미서(微緖)를 떨치고 또 혜해(慧解)를 달려 이름을 중국 서울에까지 드날렸다.  공업(功業)이 이미 이루어지자 신라로 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국(本國)인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보내 달라고 자주 청했다.  수나라 임금은 칙명을 내려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니 노소(老少)가 서로 기뻐하고 신라의 왕 김씨(金氏)는 그를 만나보고는 공경하면서 성인(聖人)처럼 우러렀다.원광은 성질이 한가롭고 다정박애(多情博愛)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표(전表)나 계서(啓書) 등 왕래하는 국명(國命)이 모두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敎化)하는 일을 물으니,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과는 달랐지만 실지로는 중국의 모든 것을 보고 온 것 같아서 기회를 보아 교훈을 펴서 지금까지도 그 모범(模範)을 보였다.  나아가 이미 높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으며, 의복(衣服)과 약(藥)과 음식은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지 않고 왕이 혼자서 복을 받으려 했으니, 그 감복하고 공경한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은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문하면서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일을 물으니, 그는 상서로운 것을 말하여 그 공덕(功德)이 바다 구석에까지 미쳤다.신라 건복(建福) 58년(640)에 그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더니 7일을 지나 간곡한 계(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륭사(皇隆寺) 안에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99세요, 때는 당(唐)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이라야 옳을 것이다).  임종(臨終)할 때 동북쪽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俗人)들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기면서 그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지내는데 국가에서 우의(羽儀)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그 뒤에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은 일이 있었는데, 지방 속담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후손(後孫)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므로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벼락이 사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숭배하게 되었다.그의 제자 원안(圓安)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윽한 곳에서 도(道)를 구하면서 스승을 우러러 사모했다.  그는 드디어 북쪽으로 구도(九都)에 가고, 동쪽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쪽으로 북쪽 중국인 연(燕)과 위(魏)에 가고, 뒤에는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리하여 각 지방의 풍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려 가지 경륜(經綸)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익히고 자세한 뜻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 심학(心學)에 돌아갔는데 세속 사람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 도(道)가 높다는 소문이 나자 특진(特進) 소우(蕭瑀)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藍田) 땅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 공급이 온종일 변함이 없었다.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렇게 말했다.  "본국(本國)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으므로 원광을 청해 궁중에 들여 별성(別省)에 모셔 있게 하면서 매일 밤 두 시간씩 깊은 법을 말하여 참회의 계(戒)를 받으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다니니 왕후(王后)와 궁녀(宮女)들도 모두 이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거듭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病室)에 머물러 있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정법(正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보시(布施)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쓰게 하니, 남은 것은 다만 가사(袈裟)와 바리때뿐이었다."또 동경(東京)의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에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로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히 지내면서도 도를 닦으려고 생각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살기를 4년, 이때 중 하나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주술(呪術)을 배우기도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서 불경을 외는데 갑자기 신(神)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의 수행(修行)은 참 장하기도 하오.  대체로 수행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무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빨리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남의 정념(情念)을 괴롭히기만 하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을 방해하여 매양 지나다닐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오.  그러니 법사는 나를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오.  만일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오."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중은 대답한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魔鬼)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근심하시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중이 무어라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 두려워서 대답했다.  "아직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은 말한다.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해서 말을 보태서 하시오.  그대는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오."  말을 마치고 가더니 밤중에 벼락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튿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보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한다.  "내 나이가 거의 3,000세가 되고 신술(神術)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이야 조그만 일인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소.  나는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하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 몸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해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여 이 나라의 모든 혼미(昏迷)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으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이에 신은 중국 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법사는 그 말에 의해서 중국에 갔으며,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달하고 유교(儒敎)의 학술(學術)까지도 겸해서 배웠다.진평왕(眞平王) 22년 경신(庚申; 600, <삼국사三國史>에는 다음해인 신유년辛酉年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는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서 본국에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갔다.  밤중에 신이 역시 와서 법사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먼 길을 어떻게 왕복하였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 또한 그대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말하고는 이에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법사가 또 청했다.  "신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가를 바라보시오."  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속칭(俗稱)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개에 사신(捨身)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영원히 가 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 주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법사는 항상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항상 변방을 침범하니 왕은 몹시 이를 걱정하여 수(隋)나라(마땅히 당唐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수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더니 30만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한 것을 세상 사람은 알았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또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마을의 추항(추項)과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함께 사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方言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으로 고시古尸(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시사古尸寺(곳절)라고 하니 갑사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잠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시속 선비는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을 주시어 평생의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원광이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1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이요, 2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이요, 3은 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이요, 4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5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일은 모두 알아듣겠습니다마는, 말씀하신 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것은 아직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광이 말했다.  "6재일(齋日)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개 등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또한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인 것이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또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613, 즉 진평왕眞平王 즉위 35년)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자 황룡사(黃龍寺)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高僧)들을 청해다가 불경을 강의하니 원광이 제일 윗자리에 있었다.논평해 말했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후로 진량(津梁)이 비로소 설치되었으나 당오(堂奧)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어리석고 어두운 중생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원광은 살던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이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施主)하던 여승(女僧)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는데, 그 당시 덕의(德義)가 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도 그의 위에 뛰어날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세상을 떠나니 부도(浮圖)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 지금의 안강安康 서남쪽 골짜기 즉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있다)에 있다.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皇隆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고 했는데 그 장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황룡사(黃龍寺)의 잘못인 듯 싶으니,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예와 같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香奠)의 두 전기(傳記)에 있는 글에 따르면, 그의 성은 박(朴)과 설(薛)로 되었고, 출가(出家)한 것도 동쪽과 서쪽으로 되어 있어 마치 두 사람 같으니, 감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결정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전기를 모두 적어 둔다.  그러나 그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과 운문(雲門)의 사실이 없는데,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항간(巷間)의 말을 가지고 잘못 글을 윤색해서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을 지어 함부로 운문사(雲門寺)의 개조(開祖)인 보양(寶壤) 스님의 사적과 뒤섞어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뒤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편찬한 자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고자 한 자(字)도 가감(加減)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진(陳)·수(隋) 때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으며, 혹시 있다고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원광 뒤로 계속해서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길을 열었다 하겠다.찬(讚)해 말한다.바다 건너 한(漢)나라 땅을 처음으로 밟고/몇 사람이나 오가면서 밝은 덕을 배웠던가./옛날의 자취는 오직 푸른 산만이 남았지만,/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은 들을 수 있네.

삼국유사 권 제4 의해(意解) 제5 보양이목(寶壤梨木) :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궤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더니 이내 없어졌다(상고하건대 원광圓光은 진陳의 말년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隋의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 가서갑嘉西岬에 살다가 황륭사皇隆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햇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 초년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절이 이룩될 것을 보고 기뻐하여 여기에 왔을 것이다)....중략..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璃目)의 사실을 원광(圓光)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또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사(備虛師)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 데다가 더구나 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寶壤)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속고승전 권13 의해편(義解篇)9 원광전(圓光傳) : 번역은 고려대장경 영인본 제32권(K. 1075)를 저본으로 삼아 이창섭이 옮긴 《續高僧傳》 전 3권 중 2권(75~78쪽),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 1997년 3월30일 1판 1쇄, 2002년 4월20일 1판 4쇄를 기본으로 하되, 일부 문구는 손질했다. 圓光傳은 권13 義解篇 9에 수록됐다. 참고로 이 篇 편목은 아래와 같다.

義解篇九 本傳十七 附見七

 唐京師大莊嚴寺釋慧因傳一

 唐安州方等寺釋慧暠傳二

 唐同州大興國寺釋法祥傳三

 唐終南山玉泉寺釋靜藏傳四(道刪)

 唐新羅國皇隆寺釋圓光傳五(圓安)

 唐蒲州仁壽寺釋海順傳六(行友)

 唐京師普光寺釋曇藏傳七

 唐京師大莊嚴寺釋神迥傳八(玄究)

 唐京師定水寺釋僧鳳傳九(法位)

 唐京師普光寺釋道岳傳十(明曠 明略)

 唐汴州慧福寺釋功迥傳十一

 唐汴州安業寺釋神照傳十二

 唐蒲州栖巖寺釋道傑傳十三

 唐蒲州栖巖寺釋神素傳十四

 唐東都天宮寺釋法護傳十五

 唐蜀都寺釋玄續傳十六

 唐蘇州法流水寺釋慧壁傳十七

釋圓光. 俗姓朴. 本住三韓. 卞韓馬韓辰韓. 光即辰韓新羅人也. 家世海東祖習綿遠. 而神器恢廓愛染篇章. 挍獵玄儒討讎子史. 文華騰翥於韓服. 博贍猶愧於中原. 遂割略親朋發憤溟渤. 年二十五. 乘舶造于金陵. 有陳之世號稱文國. 故得諮考先疑詢猷了義. 初聽莊嚴旻公弟子講. 素霑世典謂理窮神. 及聞釋宗反同腐芥. 虛尋名教實懼生涯. 乃上啟陳主請歸道法. 有敕許焉. 既爰初落采即稟具戒. 遊歷講肆具盡嘉謀. 領牒微言不謝光景. 故得成實涅槃薀括心府. 三藏數論偏所披尋. 末又投吳之虎丘山. 念定相沿無忘覺觀. 息心之眾雲結林泉. 並以綜涉四含功流八定明善易擬筒直難虧. 深副夙心遂有終焉之慮. 於即頓絕人事盤遊聖蹤. 攝想青霄緬謝終古. 時有信士宅居山下. 請光出講固辭不許. 苦事邀延. 遂從其志. 創通成論末講般若. 皆思解俊徹嘉問飛移. 兼糅以絢采織綜詞義. 聽者欣欣會其心府. 從此因循舊章開化成任. 每法輪一動. 輒傾注江湖. 雖是異域通傳. 而沐道頓除嫌[郗-巾+ㄙ]. 故名望橫流播于嶺表. 披榛負橐而至者相接如鱗. 會隋后御宇威加南國. 曆窮其數軍入楊都. 遂被亂兵將加刑戮. 有大主將望見寺塔火燒. 走赴救之了無火狀. 但見光在塔前被縛將殺. 既怪其異即解而放之. 斯臨危達感如此也. 光學通吳越. 便欲觀化周秦. 開皇九年來遊帝宇. 值佛法初會攝論肇興. 奉佩文言振績徽緒. 又馳慧解宣譽京皋. 勣業既成道東須繼. 本國遠聞上啟頻請. 有敕厚加勞問放歸桑梓. 光往還累紀老幼相欣. 新羅王金氏. 面申虔敬仰若聖人.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慍結不形. 而牋表啟書往還國命. 並出自胸襟. 一隅傾奉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請同觀國. 乘機敷訓垂範于今. 年齒既高乘輿入內. 衣服藥食並王手自營不許佐助. 用希專福. 其感敬爲此類也. 將終之前. 王親執慰. 囑累遺法. 兼濟民斯爲說. 徵祥被于海曲. 以彼建福五十八年. 少覺不悆. 經于七日. 遺誡清切. 端坐終于所住皇隆寺中. 春秋九十有九. 即唐貞觀四年也. 當終之時. 寺東北虛中音樂滿空異香充院. 道俗悲慶知其靈感. 遂葬于郊外. 國給羽儀. 葬具同於王禮. 後有俗人兒胎死者. 彼土諺云. 當於有福人墓埋之. 種胤不絕. 乃私瘞於墳側. 當日震此胎屍擲于塋外由此不懷. 敬者率崇仰焉. 有弟子圓安. 神志機穎性希歷覽. 慕仰幽求遂北趣九都. 東觀不耐又西燕魏. 後展帝京備通方俗. 尋諸經論跨轢大綱. 洞清纖旨晚歸心學. 高軌光塵. 初住京寺. 以道素有聞. 特進蕭瑀. 奏請住於藍田所造津梁寺. 四事供給無替六時矣. 安嘗敘光云. 本國王染患. 醫治不損. 請光入宮. 別省安置. 夜別二時爲說深法. 受戒懺悔. 王大信奉. 一時初夜王見光首. 金色晃然有象日輪隨身而至. 王后宮女同共睹之. 由是重發勝心. 克留疾所. 不久遂差. 光於卞韓馬韓之間. 盛通正法. 每歲再講匠成後學. 嚫施之資並充營寺. 餘惟衣缽而已.

승려 원광은 속성이 朴氏이며, 본래 삼한(三韓) 땅에 살았다. 삼한이란 변한(卞韓) 마한(馬韓) 진한(辰韓)을 말하니 원공은 진한의 신라 사람이다. 집안은 해동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 세대를 이어갔으며, 또한 그는 정신과 도량과 재간이 넓고 탁 트여 문학과 문장을 사랑하고 그것이 몸에 베였다. 그리하여 불교와 유학을 비교 섭렵하고 제자백가와 역사를 검토하고 응수하여 문장의 빛남으로 韓에서 명성이 치솟았다. 그러나 박학하고 아름다운 면에서는 아직도 中原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점이 있었기에 드디어 친한 벗들과 교유를 잘라 없애고 발분하여 渤海의 깊은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하고는 나이 26에 배를 타고 金陵에 이르렀다. 陳은 세상에서 文國이라 칭했다. 그런 까닭에 앞서 가졌던 의문을 묻고 고증할 수 있었으며 道를 묻고 진리를 밝히게 되었다. 처음 莊嚴寺에서 승민(僧旻)의 제자가 하는 강론을 듣고는 평소 젖어온 세간의 典籍들이 이치에 있어서는 신의 영역을 다 추궁했다고 생각했으나 불교의 종지를 듣게 되자 도리어 그것이 썩은 겨자와 같으며 거짓으로 이름난 敎를 찾았을 뿐 사실은 생명이 끝남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마침내 진 황제에게 上啓하여 道法에 귀의하게 하여 주기를 요청하니 칙명이 내려 이를 허가했다. 이윽고 처음으로 머리를 깎고 곧 구족계를 받았으며 두루 講院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도모를 갖추어 다 배우고 현미한 말뜻을 옷깃에 받아 기록하면서 세월이 흘러도 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成實論과 열반경을 그 심장부에 묶어 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삼장(三藏)과 수론(數論)은 그가 책을 펼쳐 찾는 대상이었다. 말년에는 다시 吳郡의 虎口山에 투신하여 念과 定을 따라 수행했으나 각관(覺觀)을 잊은 일이 없었다. 당시 좌선(息心)하는 대중이 林泉에 구름 같이 모였는데 모두가 四含을 두루 섭렵하고 八定(色界四定과 四無色定)에 공덕이 흐르는 사람들이라 좋은 벗에 견주기 쉽고 筒이 곧으니 이지러지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이에 그는 깊이 오래 품은 마음과 부합되어 드디어 이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이 곳에 몸담아 돌연 인간세계의 일과는 인연을 끊고 성인의 발자취를 맴돌며 노닐었고, 생각을 푸른 하늘에 거두어들이고 영구히 세상과는 이별하였다. 당시 한 信士가 있어 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가 원광에게 出講을 청했으나 굳게 사절하고 허락하지 않다가 간절하게 마중나와 초청함에 마침내 그의 뜻을 따라 처음 성실론을 通釋하고 마지막에 반야경을 강의하니 모두가 그의 생각과 깨달음이 俊徹하다 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널리 퍼졌다. 아울러 눈부신 문채를 섞어 글 내용을 모아 짜내니, 흐뭇하게 듣는 사람들의 심장에 와 닿았다. 이 때부터 舊章을 되풀이하며 그 곳에 눌러앉아 교화를 여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法輪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곧 강과 호숫물을 기울여 쏟아붓듯하니 비록 이것이 이역에서 행하는 보통 傳法이기는 했으나 그의 도풍에 목욕한 사람들은 별안간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과 틈이 제거되었다. 그런 까닭에 명망이 橫流하여 嶺南 땅에 전파되어 가시덩쿨을 헤치고 바람을 등에 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졌다. 마침 수 황제가 천하를 거느리게 되자 그 위세가 남쪽 나라에 가해져 진 나라의 달력은 그 수를 다하게 되고 수나라 군대가 楊都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원광은 마침내 亂兵들에게 붙잡혀 곧 刑戮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大主將이 있어 불탑에 불이 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이 불을 끄려 했다가 불의 형상은 조금도 없고 오직 원광이 탑 앞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포박당하여 곧 살해당하려는 모습만 보였다. 이미 그 기이함이 다르다 하여 곧 포박을 풀고 그를 놓아주었다. 이는 위태한 처지에 임하여 감응에 도달함이 이와 같았음을 말해준다. 원광은 학문이 吳越에 통했기에 문득 周秦의 교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 9년에 수도를 찾아와 유각하였다. 마침 불법이 처음 모임을 열고 攝論 강론이 처음 일어나던 때를 만나 그는 경문의 말씀을 받들어 가슴에 담고 아름다운 遺緖의 업적을 진작하였다. 또한 지혜와 알음알이를 몰고나가 서울 언덕에 명성을 베풀어 공훈과 업적이 이루어지자 도를 동쪽 땅에도 이어줄 필요가 생겼다. 본국에서도 멀리 소문을 듣고 자주 상계하여 그의 환국을 요청했다. 이에 황제의 칙명이 내려 후하게 위로와 문안을 더하고 그를 놓아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왔다가 들어가는 데 여러 해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니 늙은이에서 어린아이까지 모두 기뻐하고 신라왕 김씨는 면대해서 경건하게 공경을 표시하고 성인처럼 우러러 보았다. 원광은 성품이 비고 한적함을 좋아했으나 마음은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말은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움이나 번뇌는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라의 명으로 주고받는 牋이나 表 啓 書는 모두가 그의 가슴 속에서 나왔으며 모든 지방에서 마음을 기울여 그를 받들고 모두가 그에게 맡겨 다스리는 방책으로 삼았다. 그에게 道化의 길을 물어보았으니, 금의환향한 것과는 달랐다. 왕은 그에게 함께 나라를 보살피자고 청하여 그는 기연을 타고 교훈을 부연하여 지금까지 모범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가 이미 많아 가마를 타고 궁중에 들어갔으며 의복과 약품은 모두 왕이 손수 스스로 경영하고 다른 사람이 보좌하여 도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이것으로 복을 왕이 독차지하기를 희구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경받기가 이러한 종류였다. 곧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은 친히 손을 잡고 위문하며 누누이 법문을 남겨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백성을 구제할 것을 설법하여 상서로운 조짐이 나라 안(海曲)을 덮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신라 연대로 建福 58년에 조금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7일이 지나서 淸絶한 유계를 남기고 단정하게 앉아 주석하던 皇隆寺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 99세였고 이 때는 곧 당 정관 4년(630)이었다. 임종을 맞을 때가 되니 허공에서 음악이 공중에 가득하고 기이한 향기가 사원을 매워 道俗이 한편 슬퍼하며 한편 경하하면서 그의 영령(靈)이 하늘에 감응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외에 매장하니 나라에서 雨儀(의식에 쓰는 장식용 새 깃털)와 장례용구를 공급하니 왕의 장례와 같게 했다. 그 후 한 속인이 있어 아이가 모태에서 죽었다. 그곳 속담에 이르기를 “곧 복이 있는 사람 묘 앞에 묻으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몰래 태아를 원광 분묘 옆에 묻었더니 그날로 우레가 치면서 이 태사의 시체가 于塋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로 말미암아 불경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도 거의가 그를 숭상하게 되었다. 제자인 원안(圓安) 또한 정신과 지조가 기민하고 슬기로웠고 성품이 모든 것을 두루 보기를 희구했다. 그윽히 숨은 진리를 찾기를 그리워하고 우러러보다 마침내 북쪽 아홉 도시로 달려갔다. 동쪽을 관하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서쪽 燕과 魏를 돌아본 뒤 발길을 황제가 있는 서울로 두면서 두루 지방 풍속에 통하고 모든 경론을 찾아 그 大綱에 수레바퀴를 얹어 섬세한 종지를 맑고 훤하게 알게 되었다, 만년에 心學에 귀의하여 높이 빛나는 後塵의 자취를 남겼다. 처음 京師의 절에 주석하다 그가 도속들에게 알려진 일이 있어 特進官 소우(蕭瑀)가 주청하여 藍田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주석케 하고 四事의 공급을 여섯 때에 바꾸는 일이 없었다. 원안이 어느날 원광에 대해 말했다. “본국 왕이 병환에 전염되어 의원이 치료해도 덜해지지 않아 원광 스님을 초청하여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別省에 안치하고 밤에 따로이 두 시기에 왕을 위해 깊은 법을 설하고 계를 받고 참회하게 하였는데 왕이 크게 이를 신봉했다. 한 때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 찬란하게 밝아 태양의 형상이 있었으며 그 금색의 광명이 몸 따라 그곳에 이르렀다. 왕후와 궁녀들 또한 다 같이 함께 이를 보았고 이로 말미암아 거듭 거룩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금색 빛을 병든 곳에 머물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원광은 변한과 마한 사이에서 크게 정법을 유통시켰으며 해마다 두 번 강론하여 스승으로 후학을 이룩했고 보시로 들어온 자산은 모두 절을 경영하는 데 충당하여 죽은 후에 남은 것은 衣鉢 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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