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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유럽 철기시대의 사형수들 (5)

by 초야잠필 2020.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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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서울의대 생물인류학 및 고병리학 연구실)

 

전술한 타키투스는 헤로도투스와 함께 고전시대 유럽사의 사마천, 반고라 할 만 사람이다. 

 

서기 56년에 태어나 서기 117년에 사망했다니, 동아시아사에서 중국은 전후한 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후한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이며, 우리나라는 한반도 북쪽에는 한의 군현이, 그 외곽에는 부여, 고구려, 삼한 등 토착왕조들이 성장하고 있을때였다. 바다 건너 일본은 아직 야요이시대-. 

 

생전에 원로원 의원으로 여러 요직을 거쳤다는데 정치가로서보다 역사가로서 더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저술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게르마니아-. 

 

라틴어 원전으로는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라고 쓰며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라고 부른다는데 줄여서 "게르마니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책의 내용은 유럽 북부에 살고 있던 게르만 족에 대한 풍속-민속지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 보면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적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비슷한 성격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중심지로서 그 외곽지역을 바라보고 담담히 적어 내려간 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게르마니아"는 대상이 된 게르만족에 대한 평가에 있어 독특한 관점을 고수하여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원삼국시대의 한국지도. 이 지도에 묘사된 한국인의 조상 정치체의 위치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바탕한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시대 게르만 족의 위치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의해 아래와 같이 비정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게르마니아는 거의 비슷한 성격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마그나 게르마니아. 타키투스가 묘사한 게르만 족 본진. 

 

 

타키투스가 바라보는 게르만 족의 모습은 단순한 야만족의 모습이 아니었다. 타키투스는 공화정 시대의 강건하고도 검박하고 용감한 로마인의 모습에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당시 로마 사회의 모습-. 사치와 향락과 풍족함이 넘치는-. 반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그런 모습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취향은 게르마니아의 기술에 여실히 반영되었다. 이혼과 다중혼을 반대하고 강한 윤리적 원칙을 고수하는 게르만 사회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기술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같은 책에서 로마 사회에 만연한 비윤리적 모습을 함께 기술하며 이를 대조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보면 명백하다. 물론 그의 책 전반에서 게르만 족에 대한 우호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게르만족은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에다 게으르고 야만적이라"는 이야기는 당연히 들어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도 불구하고 유럽문화에서 강건하고 소박한 게르만족의 이미지는 이 시기에 사실상 완성되었으며 이러한 시각은 근대 민족주의 시기에 찬란히 부활한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 전투로 무려 로마군 3개군단이 섬멸되어 게르만 지역에 대한 로마의 팽창주의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통일 전 독일사회 민족주의자들의 역사적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게르마니아"에서 이상적인 독일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 그림에 보이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게르만 족의 거주지로 진격하던 로마군단 3개군단을 서기 9년 전멸시키면서 로마의 게르만 정복을 사실상 좌절시킨-. 신채호 선생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부를 만한 전투인데-.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독일민족주의자들의 양손에 들린 두개의 역사적 무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비기독교-독일민족 원리주의적" 전통은 신생 독일 제국을 거쳐 히틀러의 제 3제국에 까지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독일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바그너 음악에도 "게르마니아"에 비친 독일인의 모습은 깊은 영향을 미쳤다. 

 

타키투스의 이러한 게르만에 대한 관점이야 말로 여러모로 한국사에서 한서-삼국지 등 기술에 녹아 있는 동방민족에 대한 시각과 많이 닮아 있다. 

 

한서를 저술한 반고의 동방사회에 대한 평은 타키투스가 게르만 족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만큼 빼 닮은 것이다. 반고가 기자의 유풍이 동방에 남아 있다고 찬탄한 것은 타키투스가 그리는 로마인 원형의 모습이 게르만족에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𥧾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漢書 卷二十八下 地理志 第八下)

 

현도와 낙랑은 무제때 설치되었다. 모두 조선, 예맥, 구려 만이들이다. 은의 도가 쇠함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사람들을 예의로 가르치고 농사짓고 누에를 쳐 옷감을 짜게 만들었다. 낙랑조선민은 범하면 안되는 8개의 조목이 (있었는데) 살인은 죽음으로써 갚고 사람을 상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하며 도둑질을 하면 피해자의 노예로 만들었다. 이때 스스로 보속하고자 하면 50만전을 내야 하였다. 비록 노예를 면하여 평민으로 남게 되더라도 세속에서 이를 부끄럽게 여겨 혼인 상대를 찾을수가 없었다. 이로써 (조선)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 않으며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아도 되었고 부인들은 음란하지 않아 정절이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밥을 먹을때 변두를 사용하였으며 도읍에 사는 사람들은 자못 관리나 내군의 상인들을 모방하여 杯器를 사용하여 밥을 먹는다. 한군현이 처음 설치 되었을때 그 관리는 주로 요동군에서 많이 데려왔는데 관리들이 조선 백성들이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것을 보고 또 조선에 간 상인들과 함께 밤만되면 도둑질을 하여 풍속이 점점 각박하여졌다. 지금은 (원래 8개였던) 범금이 불어나서 60여개나 된다. 귀하도다. (기자의) 어질고 현명한 교화여! 그러나 (이렇게 각박해졌다 해도) 동이의 천성이 유순하여 다른 세방향의 오랑캐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공자께서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뗏목을 바다에 띄워 구이가 사는 지역에 옮겨가 살고자 한것도 당연하도다! 

 

 

*** 이하는 이 글에 대한 김태식 간평이다. 필자 신동훈 박사의 글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당대의 로마제국이 이전 시대의 용감성과 건전성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한 타키투스는 로마제국 밖에 위치하면서 끊임없이 로마제국을 위협한 야만 게르만족에서 그런 모습을 찾고자 했다. 물론 시종 게르만족을 야만으로 보는 그런 관점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타키투스가 적출한 이런 게르만족 모습은 근대국민국가 시대가 발흥하고, 더구나 그 게르만 계승을 표방한 민족국가가 본격 태동하면서 그네들이 이상향으로 삼아야 할 성전으로 재발견된다. 히틀러가 게르만족에서 민족 영광을 찾고 바그너가 음악을 통해 게르만 영웅주의를 읊었을 때, 그건은 굉음을 내고 인류사에 파멸을 불러왔다. 

 

니체 역시 그 이데올로그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부르짖은 초인, 그것이 현실세계의 절대권력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실제로 소화하는 사람들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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