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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조지서造紙署, 국영 종이제조공사 본사

by taeshik.kim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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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지서(造紙署)는 “표문(表文), 전문(箋文), 자문(咨文)의 용지 및 여러 가지 종이의 제조를 관장한다.”라고 하였으며 제조(提調) 2원(員)과 종6품의 사지(司紙) 1원과 별제(別提) 4원을 두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점차 축소되어 《속대전》에서는 제조가 1명으로 줄어든다.

그러다가《대전통편》에서는 1명을 도로 증원하여 인근에 설치된 연융청의 총융사(摠戎使)가 담당하게 하였고, 사지는 《속대전》에서는 그 자리를 없앴고, 별제는 《속대전》에서는 2명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대전통편》에 따르면 조지서에 배속된 장인은 목장(木匠) 2명, 염장(簾匠) 8명, 지장(紙匠) 81명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4년(1626) 8월 4일 계묘 기사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조지서(造紙署)는 전적으로 사대 문서(事大文書)에 쓸 종이를 제작하기 위해 설치한 곳입니다. 이에 조종조(祖宗朝)에서 기술자를 널리 모집하고 도군(搗軍)을 많이 배정하는 한편 사옥(舍屋)을 정결하게 하고 기계를 완비한 다음 종이의 품질이 지극히 정교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부(禮部)에서 천하에 비길 곳이 없다고 칭송했던 것은 진실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변란 이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면서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여, 평소 81명이던 지장(紙匠)은 지금 겨우 4명뿐이고, 60명이던 도군(搗軍 도침꾼)은 지금 겨우 5명뿐입니다.

거형방(去荊房), 숙정간(熟正間), 지통간(紙筒間) 등과 같은 사옥은 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도침간(搗砧間)은 지어진 햇수가 오래되어 낡고 헐어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합니다. 설비와 기술자가 이미 이와 같은 형편이니, 어떻게 감히 종이의 품질이 예전의 상태대로 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물력으로 비록 하나하나 다시 설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가장 긴요하여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옥은, 해조(該曹 공조)로 하여금 헤아려 자재를 지급하게 함으로써 제작하는 곳을 축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제조(提調)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항상 업무를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여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洪瑞鳳啓曰, 造紙署, 專爲事大紙地而設焉, 自祖宗朝, 廣集匠手, 多定搗軍, 淨其房屋, 完其器械, 而方責紙品之至精, 故禮部之稱, 爲無比於天下者, 良以此也。變亂以後, 凡具蕩然, 不成模樣, 平時紙匠八十一名, 而今只四名, 擣軍六十名, 而今只五名, 如去荊房熟正間紙筒間等屋舍, 無復遺存, 唯一擣砧間, 草創年久, 頹腐破陋, 不遮風雨, 器具匠役, 旣已如此, 而安敢望其紙品之能復舊樣乎? 以今日之物力, 雖未能逐一復設, 其中最緊不可不設之房屋, 請令該曹量給材料, 以營造作之所, 臣待罪提調, 常切瘝曠之念, 不敢不達。敢啓。傳曰, 依啓。


임진왜란 이전에 표문(表文), 전문(箋文), 자문(咨文)에 사용하는 용지는 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인 조지서에서 직접 제작하였으나 이후에는 실제 제작하지 않고 공납(貢納)한 종이를 도침하여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종이로 재가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서에 어떤 건물들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이것 말고는 전혀 없다. 크게는 거형방(去荊房), 숙정간(熟正間), 지통간(紙筒間), 도침간(搗砧間)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거형방은 아마도 원재료인 닥나무 껍질을 처리하여 깨끗한 펄프를 만드는 공정을 담당한 곳이었을 터이고, 숙정간은 이를 삶고 종이로 떠내는 공정을 맡은 곳이었으며, 지통간은 종이로 통을 만드는 곳이었을 테고, 도침은 이를 다듬이질하여 상급의 종이로 가공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홍서봉이 이처럼 아뢰어 윤허받았으나 종이를 제작할 여타 건물은 중건되지 못한 듯하다.

첨부한 지도의 아래 造紙署는 造紙署路를 이른다. 오늘날 자하문로 일부와 숙정문로가 조지서길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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