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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미라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7)

by 초야잠필 2019.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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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서 우리는 중국에서는 곤충, 나무뿌리나 도굴꾼 침범을 막고자 주자朱子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채택한 요장묘가 주자가례朱子家禮 형태로 한반도에 수입될 때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리고 불교의식으로 점철한 고려시대 제반 장송葬送松 의례를 개혁하고자 하는 조선시대 신진사대부들이 일련의 개혁 일환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실石室 대신 주자가례에 기록된 대로 회곽묘를 도입하고자 한 것도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제는 이렇게 도입한 회곽묘가 실제 조선 역사에서 어떻게 변천하고 발전하였는지를 살펴야겠다. 

 

 

조선시대 회곽묘의 발굴상황

 

앞에서 이야기했 듯 조선 회곽묘는 그 원류라 할 중국에서 기술적인 도입한 것이 아니라, 주자가례가 기술한 내용을 지남指南으로 삼아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유학자들이 문헌만으로 복원해 낸 결과였다. 설계도가 없는 상태에서 텍스트가 말한 것들을 시각화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고례古禮를 복원하면서 문헌에만 의지하면서도 이처럼 당당할수 있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은 공자의 말에 서도 뒷받침될 수 있겠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夏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수 있지만, 기杞나라는 내가 고증하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말할 수 없다). 은殷나라의 예에 대하여 나는 능히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송宋나라는 고증하기에 부족하니 그렇게 할 수 없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만 많아봐라 나는 충분히 고증해 낼 수 있느니라...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논어》 팔일편八佾篇)

 

공자님 이 말씀은 엄청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북송 이래 신유학에서 크게 숭상하는 이론 중에 "도통道統"이라는 것이 있다. 하·은·주周 삼대三代부터 내려오던 유학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공자-맹자 때까지도 내려오다가 그 후에 맥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 도통이 끊어질 때 삼대 이래 전해오던 의례의 정수라 할 만한 "고례古禮"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의례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는 큰 골치였다. 고례로 돌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으므로 이 불교식 의례는 사전에 철저히 분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게 맹자 이래 도통이 끊어지면서 유학은 크게 문란해졌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고례 대신 편한 대로 임시로 변개한 의례인 시왕지례時王之禮가 판을 쳤고, 이 시왕지례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한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유학자들로서는 포용하기 어려운 변용도 많아, 유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한 의례와는 크게 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기다 후한後漢시대 이래 불교가 들어와 민간의 각종 의례를 불교식으로 대치하게 되면서 고례와의 거리는 더더욱 멀어졌다. 

 

필자가 가장 아름다운 동아시아 건축물로 생각하는 조선의 종묘. 심지어 이런 종묘조차 참고할 만한 "고례"가 턱없이 부족해 "문헌에 근거한 합리적 유추"가 필요할 정도였다. 조선은 중국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500년씩이나 지속한 왕조이므로 수없이 늘어나는 왕의 신주를 수용하는 방식을 결국 중국도 못 가본 길을 조선 사대부들 스스로가 찾아 갈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끊어진 도통을 다시 이었다고 자임한 사람들이 바로 북송대에 출현한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강렬한 역사의식과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해 짊어진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불교를 배척했다. 

 

스스로 맹자 이후 끊어진 참 유학, 도통을 다시 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나라와 당나라 유학은 유학의 겉모습을 지녔지 본질과는 거리가 먼 사이비 비스무리 한 것으로 질타했다. 이들은 도통이 살아 있던 시대에 존재한 고례의 모습과는 이미 멀어진 세간의 의례를 고례로 다시 복원시키고자 했으니,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고례로 참고할 만한 것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공자. 동아시아 합리적 사유의 시조라 할 만 하다

 

이 때문에 신유학이 수립된 후 중국이나 조선에서 행한 많은 "고례로의 복원"은 실상 고례 그 자체로의 복원이라기보다 공자님 말씀 대로 "문헌으로 고증해 낸 고례"에 지나지 않았다. 

 

선진先秦 문헌 자체가 이미 망실되고 소략해져 구체성을 상실한 시대였던 만큼 고증 과정에는 논리적 유추만으로는 도저히 메울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빠진 부분은 마른 걸레까지 쥐어 짜 낼 정도로 문헌을 박박 긁어 상고하거나 그것만으로도 안 되면 유학자 스스로의 "무리 없는 상상력"으로 적당히 채워가면서 복원했다. 

 

조선시대 의궤에서 시도된 많은 "고례로의 복원"은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복원이라기 보다 상당 부분 창작이다. 

 

우리가 보는 조선 후기의 많은 "고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복원"된 것이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복원이라기 보다 새로운 창작이라고도 할 만 하다. 그리고 그렇게 복원한 이면에는 공자의 아래와 같은 말씀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나한테 문헌만 많아 봐라. 나는 다 고증해 낼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회곽묘 역시 마찬가지였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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