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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지지자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한 이유

by taeshik.kim 202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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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오늘로부터 꼭 오년 전 오늘인 2017년 5월 15일의 긁적임이다. 그런대로 지금도 효능은 없지 않다 생각해 연재한다. 조금 거창하게 사마광 식(구양수였던가? 소식이었던가) 표현을 빌린다면 붕당朋黨 필연론이다.

 

맹목은 지지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오직 비판만이 갈라놓을 수 있다.

 


앞선 《비판적 지지》 포스팅에 대한 연속으로서 이번에는 이 얘기를 좀 해 볼까 한다.

작금 한국 사정을 보면 내가 지지하는 정권, 혹은 정치인이 집권했다 하면, 그 정권 그 정치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무수한 양태를 본다.

속된 말로 빠라는 양태거니와, 그 양태를 보면 숭배나 진배없다. 노무현 정부 시대의 노빠, 박근혜 정권 시대의 태극기파가 대표적이다.

나는 권력은 언제나 비판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내가 지지한 정권이라 해서, 그 이유만으로 그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할 수는 없다. 나는 이를 저 표현을 빌리면 소위 비판적 지지라 본다.

하지만 한국사정에서 이 비판적 지지는 내 보기엔 원천으로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는 뜻이거니와, 미래에는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왜 불가능한가?

그 빠에 견줄 만한 또 다른 반대편의 반대빠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반대빠는 언제나 상대 진영을 향해 비난만 퍼부어 댄다. 그 반대빠는 그 상대가 언제나 무너지기만을 기대한다.

언제나 상대의 붕괴를 기다리는 반대빠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가 지지하는 정권에 대한 비판은 무척이나 어렵다. 이런 비판은 자칫 그 붕괴를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그 반대빠의 일원이라는 의심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아가 그 지지자로서도 설혹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에 실책이 보여도, 그에 대한 비판에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까닭이, 그 정권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 사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지지와 맹목, 그 갈림길



사방에서 적들이 공격해대는 마당에, 나라도 이 정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이 나는 빠를 양산하는 독소라고 본다.

그런 사례로 내가 기억하는 노무현 정부 시대 때 일화가 있다. 한겨레가 당시 노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를 연일 게재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었는지, 아니면 그 청와대 참모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공개 석상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다름 아닌 한겨레가 우리한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비판은 《정관정요》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관정요》를 보면, 위징만한 간관 없다. 이 《정관정요》를 보면, 이세민만큼 비판을 잘 받아들이는 군주 없다.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세민 성군 만들기라는 의도 아래 철저히 편집된 책에 지나지 않는다. 잔소리 좋아하는 군주 없다. 이세민은 위징이 잔소리를 하도 많이 한다 해서, 그가 죽어 신도비가 서자, 그 신도비를 뽑아버리고 훼손했다.

이런 그가 나중에 반성하는 뜻에서, 고구려 원정을 극력 반대한 위징을 떠올리며, 처참한 고구려 원정 실패에서 귀환하는 길에 위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는 그 무덤을 복구하라 명령했다지만, 그가 이리한 까닭은 위징이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이지,

살아 있었다면 네 놈 잔소리에 부정 타서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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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지지, 그 허무맹랑함에 대하여

 

 

비판적 지지, 그 허무맹랑함에 대하여

내 기억에 이 말이 특히 유행한 때가 87년 대선 무렵이 아닌가 한다. 그때 양김씨는 통합 열망을 뒤로하고 각자도생을 획책했다가 폭망하고는 노태우 당선을 지켜봤다. 이때 소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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