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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출판문화 진작을 부르짖은 윤춘년尹春年

by taeshik.kim 2020.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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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독거노인 기호철 선생이 느닷없이 조선 최고 재상으로 영조 연간 홍계희를 드는 바람에 역사에 매몰되거나, 혹은 부당하게 매도되거나, 혹은 그 매도가 나름 역사성을 지닌다고 해도 다른 측면에서 조명할 부분은 없는가 라는 자문自問을 하게 되거니와, 그런 점에서 과거 내가 기사로 다룬 이로써, 윤춘년尹春年이라는 사람이 퍼뜩 떠올라 그와 관련해 내가 긁적인 기사 두어 편을 새삼 꺼내봤다. 


이 윤춘년을 본격 조명하기 시작한 이는 지금은 성균관대 한문교육과(한문학과인가?)에 정착한 안대회 교수라, 당시만 해도 안 교수는 강사 신분이었다. 이후 영남대로 갔다가, 명지대로 옮겼으며, 다시 성균관대로 옮겨 지금 자리에 안착했다. 


 

2001.01.26 11:54:37
<400년전 비평가 겸 출판인 윤춘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우리나라에는 온갖 물건을 매매하는 점포가  다 있는데 유독 서적만 점포가 없다"면서 서적포라는 출판기관을 설치하자고 400년  전에 주창한 선구적 출판문화인이 있었다.

김시습(金時習)이야말로 동방의 공자이니 공자를 보지 못했으면 김시습을  보라고 파격 선언을 하고는 「금오신화」를 비롯해 그가 남긴 글들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활자로 출판한 열렬한 김시습 팬이 있었다.

"무릇 글자마다 세 가지 소리를 갖고 있거니와 초성.중성.종성 그것이니 초성은 하늘의 소리이고 종성은 땅의 소리이며 중성은 사람의 소리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중성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세종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는 논리를 잘  갖추어 소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처럼 훈민정음에 구현된 음성학을 통해 시(詩)의 소리를 논한 문학비평가이자 문학이론가로, 이와 관련되는 당대 중국의 문학이론서를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조선에서 출판한 인물이 놀랍게도 우리역사에는 이미 400년 전에 있었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속한 당파가 결국은  몰락했기 때문일까. 

 

 

윤춘년 시법원류詩法源流

 

 

조선 명종 대 출판문화인이자 문학비평가로 한국은 물론 일본 문학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윤춘년(1514~1567)이라는 존재는 역사에서 철저히 매몰됐다. 

윤춘년은 당시 훈구파의 거두인 윤원형(尹元衡) 계열로 사림(士林) 세력과 격렬히 충돌했으며 1545년에는 또다른 훈구파 거대 파벌인 윤원로(尹元老)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윤원형이 정권을 장악하자 윤춘년은 중앙조정에서만 근무하면서 홍문관이나 사간원, 사헌부 등 이른바 간쟁과 언론 분야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이런 윤춘년이 반대세력, 특히 사림파에게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사림의 거두 율곡 이이는 윤춘년을 가리켜 "그가 한 논의는 모두 부처와 노자가 한 말을 주운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식견이 없었으므로 식자들이 그의 망령된  짓을 비웃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윤춘년이 왜 우리역사에서 몰각됐는지 그 까닭을 이 구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물론 윤춘년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도 이미 조선 당대에 있기는 했다.

율곡 자신도 윤춘년을 한껏 매도하면서도 "다만 벼슬살이가 비교적 청렴했으므로 원망하는 자가 적었다"고 했으며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그가 "박학다식했으며 유가 외의 학문을 두려 섭렵했고 문장에 진력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부 긍정적 시각에도 아랑곳없이 윤춘년은 사림파가 집권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다.

문학연구자를 포함한 역사가는 윤춘년처럼 역사에서 몰각된 인물을 제자리로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20대에 「균여전」을 역주했고 「한서」 열전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으며 우리 고유의 문학비평 장르인 시화(詩話) 연구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연세대 안대회(39) 강사가 400년 동안이나 한국 한문학사와 출판사에서 매몰된 윤춘년을 '복권'했다.

안씨는 최근 윤춘년의 생애와 출판 및 문학비평 활동을 종합 고찰한 「윤춘년과 시화문학」(소명출판)이라는 단행본을 통해 한국한문학 및 한국출판사에서 윤춘년이라는 선각자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

사실 윤춘년 복권 사업은 지난해 중국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서 간행한 「금오신화 」 목판본이 발견되고 더욱 놀랍게도 이것이 윤춘년이 간행했음이 밝혀지면서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안씨는 이번 연구를 통해 윤춘년이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를 겸직하면서 서적포 설치를 주창하는 등 당시 출판문화를 선도했음을 규명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윤춘년이 문학비평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당대 중국에서  간행된 것으로 조선에서 재편집해 출판한 이 분야 관련 이론서만 해도 현재까지 5종이나 확인되고 있음을 새로운 자료 발굴 등을 통해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연구를 통해 안씨는 현존 최고 목판본으로 밝혀진 중국 소장  「금오신화」를 왜 하필 윤춘년이 간행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이 김시습에 대한 윤춘년의  열렬한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아울러 안씨는 윤춘년이 당대 중국 문학이론서를 단순히 조선에서 재출판하는데 그치지는 않고 거기에는 소리를 중요시하는 따위의 윤춘년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이론이 투영돼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또한 윤춘년이 조선에서 간행한 문학이론서가 임란 때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일본 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책은 윤춘년의 생애와 활동을 고찰한 90여쪽의 논문을 제외한 600쪽가량을 저자가 새롭게 찾아낸 윤춘년 간행 서적을 영인본으로 첨가하고 있다.

시대를 앞선 선각자였고 그가 속한 당파가 결국은 몰락했기에 철저히 지워진 이름 윤춘년이 4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진면목을 알아챈 한 소장학자에  의해  조선조 최대의 출판인 겸 문학이론가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사진있음) (끝)

 

2001.01.26 16:43:56
<16세기 출판계 거물 윤춘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16세기 조선 출판계와 문예이론  분야의  독보적 인물로 밝혀진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은 당시 집권층인 훈구파 중추인물로  활약하며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때문에 조선조 당쟁사에서나 종종 등장하던 윤춘년이 최근 들어 16세기 문화계 거물로 급부상하고 있다. 윤춘년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 99년 9월 고려대 중문학과 최용철 교수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에서  간행된 현존 최고(最古) 「금오신화」 목판본을 중국 따롄도서관에서 찾아내 공개했다.  

그런데 이 목판본을 찍어 간행한 주인공이 윤춘년임이 밝혀졌다.

당쟁의 중심인물쯤으로 평가되던 윤춘년이 한국 출판문화사와 한국  문학비평사 거물로 부각되는 결정적 발판을 「금오신화」 목판본이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윤춘년이 어떤 인물이고 무슨  관계로  「금오신화」를 목판본으로 간행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의구심은 증폭되기만 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기던 연세대 안대회 강사는 윤춘년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그가 16세기 당대 뿐만 아니라 조선조 전체, 나아가 일본과 중국  출판  문학계에서도 무시못할 존재임을 발견하게 됐다.

즉 윤춘년은 도서를 공개적으로 사고 팔게 하기 위해 서적포 설치를 주창하는가 하면 도서간행에 엄청난 정력을 쏟아부은 인물로 드러났다.

그는 무엇보다 매월당 김시습 유고에 손을 대어 23세에서 37세 사이 전국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를 편년별로 모아 「유관서록」,「유관동록」,「유호남록」,「유금오록」을 엮었고 「금오신화」 또한 목판으로 활자화했다.

윤춘년이 김시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율곡 이이가 남긴 일기에서 비로소  밝혀졌다. 즉 여기서 율곡은 윤춘년이 평소에 "김시습은 동방의 공자이시니 공자를 보지 못했으면 김시습을 보면 된다"는 말하고 다녔다고 소개하고 있다.

김시습 작품인 「금오신화」가 명나라 초 구우의 「전등신화」와 불가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때문인 듯 윤춘년은 이조판서로, 교서관 제조를 겸직하던 1559년에는 「전등신화」를 간행했다. 이는 조선조 말기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윤춘년의 이런 출판활동은 문예이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안씨에 따르면 그가 간행한 문학비평 이론서로는 「시가일지」(詩家一指.1551년)와 「문전」(文筌),「문단」(文斷),「시법원류」(詩法源流.이상 1552년),  「목천금어」(木天禁語.1555년) 등 5종이 현존하는 것을 확인되고 있다.

즉, 불과 5년만에 적어도 5종 이상이나 되는 문학이론서를 찍어낸 것이다.

이들 문예이론서를 통해 안씨는 두 가지를 주목한다. 첫째, 이들  문예이론서가 모두 윤춘년 당시 중국 출판물이며 둘째, 윤춘년이 어떤 목적으로 이들 이론서를 간행 유포시켰다는 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복고주의 열풍이 몰아치던 조선문단의 일반적 흐름을  윤춘년이 통속적이며 대중적인 이들 당대 문예이론서 출판으로 혁신하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가 이때 간행한 문예이론서가 다른 나라, 특히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본 문예진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어떻든 윤춘년은 그가 가진 막강 권력을 도서출판과 문예이론서 간행에  쏟음으로써 그를 그토록 증오하던 이이조차 "벼슬살이는 비교적 청렴했다"는 말을  들었고 나아가 400년이 지난 지금 조선조 최대의 출판문화인으로 복권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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