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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폭우에 다시 찾은 보령 남포읍성

by taeshik.kim 2020.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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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땅 보령保寧 남포읍성藍浦邑城 진서루鎭西樓다. 진서루란 서쪽을 진압하는 누대란 뜻이니 읍성 전체 구역 중에서도 서쪽에 치우친 곳에 있음을 알겠다.

 

이곳이 조선시대 남포현 일대를 관장하는 지방관부 현청縣廳이 있던 자리다. 하필 왜 서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선택에 무슨 이유가 없지는 않았으리라. 다만 서쪽이라 했지만, 실제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임은 분명하나, 정확히는 서북쪽 끝에 해당한다.   

 

 

 


이 이층 누대를지나면 동서편으로 길게 난 담장과 그를 따라 중앙지점에 위치하는 3단 대문형 건물채가 나타난다.

 

 

 


이 역시 가운데로 대문이 나 있고 그 위로 간판 하나 걸렸으니 이르기를 옥산아문玉山衙門이라 하거니와 그 양옆 부속 건물채는 아마도 이 대문을 지나는 사람들을 옥죄는 경비원들이 있지 않았겠나 한다. 


 


옥산玉山은 지명일 것이요, 아문衙門은 관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니 이 남포읍성에서 다스리던 곳을 한때는 옥산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느냐 생각해 본다.


 



진서루와 옥산아문 사이엔 넓은 마당이 있어 이곳에서 혹 말 안듣는 백성들 잡아다가 주리를 틀기도 하고

 

혹은 더러 목을 치기도 했는지 모르지만


 


그 마당 오른편으로 돌비석들이 나란히 열을 이루어 이짝을 보거니와 읽으니 모조리 선정비善政碑 혹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

한놈 두시기 석섬 너구리 하며 차례로 세어보니 모두 8기요

그에 새길 글은 읽어보니 모조리 역대 남포현감藍浦顯監을 역임한 자들이라


 

 

 

개중 하나 붙잡고 더듬으니 顯監白公東奎善政(永世不忘)碑 라, 현감을 지낸 성은 백씨요 이름은 규동인 사람이 좋은 정치를 베푼 일을 영원토록 잊지않고자 세운 기념비라는 뜻이라

 

백동규白東奎라는 이로 남포현감을 역임한 이를 적출하면 저 기념비가 어느 시대 어느 무렵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이런 선정비들을 현 관아에 이런 식으로 하나씩 세워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배치는 현대 문화재 관리 당국의 소치 아닌가 하는데

 

그 훼멸을 조금은 방지하고, 흐트러진 것들을 모아놓으면 좋다 해서 이러 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이 두 친구는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려했는지 건립연도를 표시했으니

 

오른쪽 顯監申候鳳圭善政碑[현감 신봉규 선정비, 公에 해당하는 부분에 侯후 라는 글자를 쓰기도 하거니와, 저에 새긴 글자 모양으로 볼 적에는 候다. 두 글자는 흔히 혼용했다.]는 정유丁酉 5월에 세웠다고 하고 왼편 顯監成侯達榮永世不忘碑[현감 성달영 영세불망비]는 도광道光 6년 7월에 세웠다 했으니, 연표 찾아보니 도광 6년은 조선으로서는 순조純祖 26년이라, 곧 1826년이다. 

 

이런 선정비 영세불망비가 조선후기에 접어들며 유행처럼 자리잡으니 어느듯 실상과는 관계없이 퇴임엔 으레 따르는 데코레이션이 되어버리니   

그리하여 퇴임에 즈음해 저런 기념물을 세우지 않음이 이상한 시대였으니, 그것이 지역사회 백성들한테는 또 하나의 고역이었으니, 저 일을 누가 했겠으며, 저 돌맹이 하나 만들어 세우는 데 얼마만한 돈이 들어가고 부대행사 비용이 소요됐을 것임을 생각하면 간단치는 않은 문제로 대두한다.  

하긴 갑오운동을 촉발한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도 저런 선정비가 고부에 섰더랬다.

선정이 데코레이션이 된 시대. 칭송과 아부가 자동 어플인 시대였다.

 

 

 


옥산아문 처마를 올려보다 얼굴에 뭔가 걸치는 기분.

쏴 하는 기분 일어 손 살포시 들어 더듬으니 거미줄이라 살피니 주인장 간데 없으니 아마도 이 폭우에 잠시 기왓장 밑 어딘가로 피신하며 집이 무사하길 빌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폭우 피해는 적지는 아니한 듯해서 엃기고 짤렸으니, 이를 보면 재기불능이라 해서 딴 데로 옮긴 듯하거니와, 그럴려면 철거나 제대로 하고 가든지

봉황수鳳凰愁, 곧 봉황의 근심이었던가? 지훈 동탁이 저런 거미줄 칭칭한 궁궐을 보고서는 멸망한 왕조를 읽은 시가 있다 했거니와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다 산새도 비들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는가 하면 큰 나라 섬기던 옥좌玉座엔 거미줄 친 모습을 보고는 내가 몸 둘 데가 없어 한없이 울었다는데 

 

돌이키니 그가 그리 읊은 때는 갓 스무살 시절이라 그는 애늙은이였나 보다.

 

 

 

 



꼭 거이줄에 멈칫해서리오

 

대문 들어서기 전 잠깐 뒤돌인 내가 겉은 뒤를 돌인보는데 저만치 진서루 물비 잔뜩 머금곤 처연히 섰다.


 

 


옥산아문 들어서니 건물채 하나 덩그러니 이 넓은 마당 차지했을 다른 건물들은 모조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오직 저짝 뒤편 한가운데 길게 가로 누운 채 그 뒤편 성벽 너머로 저 용마루 따라 같이 굼뱅이마냥 드러누운 산 지맥이 병풍처럼 막아섰으니

그래 아이돌이요 저 산은 백댄서들이라 하리라.




그 시절 건축가가 저런 자연경관을 꼭 염두에 두고선 이 건물 설계 시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리 보니 제법 어울리는 모양새가 나긴 한다. 

 

그 앞엔 몇 살이냐 묻고 싶었지만 요샌 이랬다간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라, 대략 백년 안짝 될 성 싶한 은행나무 한 그루 시퍼럼을 뽑낸다. 


 

 

그런대로 품격은 있다하겠지만, 살피면 먼지 수북하고 진흙과 나무가 습기에 썩어문드러지며 내는 그 특유한 케케함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뒤안 돌아서니 잡초 무성이라, 이 역시 한두달이면 시들고 말 터이니, 제법 나잇살 먹음직한 측백 두 그루와 느티나무 노거수 세트를 이룬다. 이런 측면을 언제 누가 심었는지 모르나, 주로 무덤에나 쓰는 나무를, 것도 뒤안에다 심었으니, 그 의도를 내가 알지는 못하겠다. 


 

 

이 남포읍성은 근자 발굴과 정비가 없진 않았지만 현재 충청남도기념물이요, 국가지정 문화재가 아닌 까닭인지는 몰라도 손을 덜댄 까닭에 그래도 옛 풍모 많이 간직한 읍성이라는 점에서 정감이 간다.


 

 

손대지 마라.

남포읍성 경관 압권은 노송 몇 그루다.

어찌하다 나는 이곳을 지난 겨울에 찿았다가 또 찾으니 올해만 거푸 두 번을 갔다.

그날은 아주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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