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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표준국어대사전과 OED

by taeshik.kim 2018.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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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제1판 OED >


1999년 한글날을 코앞에 둔 그해 10월 5일,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은 마침내 《표준국어대사전》 첫 권을 선보였다. 상·중·하 전 3권으로 예정한 전질 중 상권으로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이다. 이는 사전다운 사전을 열망한 문화계 오랜 숙원을 마침내 푼 것이었으니, 문화사에서 지닌 의미야 오죽 크겠는가? 이에 당시 국어원 담당인 나는 이 소식을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모습 드러낸 「표준국어대사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지난 8년간 500명의 인력과 112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표준국어대사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전은 국가가 직접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이라는 사실과 함께 지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어느 사전보다 많은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편찬자인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국어연구원(원장 심재기)은 이 사전을 두고  "이제 우리도 영국의 옥스퍼드영어사전(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갖게  됐다"고 자부할 정도다.


국어연구원은 올해안으로 상··하 3권이 모두 발간될 이 사전 편찬작업을 마무리하고 오는 9일 한글날에 나올 「상권」의 전반적 모습을 5일 언론에 공개했다.


발행처가 두산동아인 이 사전은 오는 11월말 나머지 두권을 내놓게 되면 표준말과 북한말, 지방말, 옛말 등 모두 50여만 단어를 수록한 최대 국어사전이 된다.


전체 7천300쪽에 이르는 이 사전은 일반 원칙만 정하고 있는  현행  어문규정을 구체화함으로써 기존 사전들이 표기나 표준어 판정에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혼란을 막도록 했다.


또 전문어 19만 단어와 북한말 7만 단어, 지방말 2만어, 옛말 1만2천어를  수록함과 함께 단어에 따라 어원 설명을 곁들였다.


예컨대 몽골어에서 빌려온 검은말이라는 뜻의 '가라말'의 경우 '가라+말'로  풀었고 '기와'는 조선초기 한글문헌인 「석보상절」에서는 '디새'로 나타나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가면 '딜+새'로 이루어진 말임을 명시하고 있다.


부록으로 기본단어 중심의 용언 활용표와 로마자 순서로 정리된 외래어  표기목록 및 학명 목록을 수록해 이용자가 한글표기에 관한 정보를 찾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막대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된 사전이지만 수록 표제어가 많고 약간의 어원설명이 곁들여진 점을 제외하고는 기존 사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이 사전은 시중 국어사전의 고질적 병폐인 '용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전에서 용례는 생명과 같다. 특정 단어가 실제 문장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용례다.


OED의 경우 'SET'라는 단어란을 펼쳐보면 이 단어가 생성된 과정과 그것이 담고 있는 뜻풀이는 물론 이와 관련된 풍부한 용례가 무려 150쪽에 달하고 있다. 또 이런 용례도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셰익스피어나 성경을 비롯한 각종 고전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표준국어대사전은 기존 국어사전처럼 심각한 용례 부족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표제어에 따라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용례를 가려뽑기는  했으나 용례가 붙어있지 않은 단어가 훨씬 많은 데다 그나마 그 용례조차 편찬자가 짐짓 만들어낸 듯한 것이 태반이다.(사진있음)

taeshik@yonhapnews.co.kr(끝)


이를 보면 국어원 역시 《표준국어대사전》 모델로 옥스퍼드 잉글리시 딕셔너리(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염두에 두었음을 여실히 엿보인다. 요컨대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국어판 OED로 기획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첫 권인 상권을 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 8년간 500명 인력과 112억원을 투입한 사전이 고작 이 모양인가 실망을 넘어 분노로 치달았다. 왜였던가? 


나는 그 이유를 이 기사 말미에 고딕체로 처리한 대목을 통해 제기했다. 무엇보다 용례가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기탱천했다. 그런 분노를 나는 당시 이 사전 발간 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표출했다고 기억한다. 이것도 사전이라고 만들었냐고 그대로 쏘아붙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이런 용례 부족을 기사에서는 "시중 국어사전의 고질적 병폐"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용례야말로 사전의 '생명'이라고 했다. 한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용례 빵점인 사전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많은 시간과 그렇게 만은 인력과 그렇게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 국립기관에서 만든 사전임에랴? 


그 용례란 것들을 살피니 "비록 표제어에 따라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용례를 가려뽑기는 했으나 용례가 붙어있지 않은 단어가 훨씬 많은 데다, 그나마 그 용례조차 편찬자가 짐짓 만들어낸 듯한 것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용례가 없는 단어가 많다? 이게 사전인가 말이다. 집어치라고 호통을 쳤다. 


화딱지가 나서, 나는 《표준국어대사전》이 모델로 했다는 《OED》를 뒤져, 그것이 이 용례 문제를 어찌 처리하는지를 조사했다. 그 사례로 든 표제어가 바로 'set'였다. 이 말은 일상어인 데다가 그만큼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양할 뿐더러, 역사 역시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OED》는 "이 단어가 생성된 과정과 그것이 담고 있는 뜻풀이는 물론 이와 관련된 풍부한 용례"를 무려 150쪽에 걸쳐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을 들이댔다. 단어 하나에 150쪽을 할애한 것이다. 나아가 "이런 용례도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셰익스피어나 성경을 비롯한 각종 고전에서 뽑은 것"임을 주장했다. 실제로 그랬다. 


《OED》랑 비교하면 《표준국어대사전》은 쪽팔리기 짝이 없었다. 기자회견에서의 그런 내 호통과 기사에 국어원은 당연히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글날이랍시며 잔칫상으로 자랑한다고 저걸 내밀었는데, 어떤 독한 기자한테 걸려들어 하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심했다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 고생한 사람들이 앞에 있는 대놓고 비판을 해대니, 속으로는 "뭐 저런 놈이 있냐"고 했을 것이다. 안 봐도 야동이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나는 그런 내 행동과 내 저 기사에 결코 물러섬이 없다. 


내 기사가 실제 이후 사전 편찬과 수정 증보에 반영됐는지는 몰라도, 이후 저 사전은 용례 보강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요구한 대로 대충 집필자가 지 꼴리는 대로 만들어 넣는 용례가 아니라, 저명한 문학작품 등지에서 실제 용례를 뽑는 작업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 보면, 비교적 믿을 만한 용례가 그런대로 구색은 갖추게 되었다. 못 믿겠거든 저 사전 들어가서 표제어별로 검색해 봐라. 


저 사전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데 나는 큰 디딤돌 하나는 놓았다고 지금도 자부한다. 무슨 한글 관련상? 그런 게 있다면 내가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라! 


그렇다면 나는 《OED》를 어찌 접하게 되었는가? 1980년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생김새와는 달리 영문학과를 다녔다. 그것도 생김새와는 달리 Y대를 다녔다. 그 시절 나는 이런저런 데서 하도 《OED》를 자주 만나다가, 도대체 어떤 괴물이냐 궁금해서 Y대 중앙도서관에서 그것을 찾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을 처음 접한 충격은 지금도 선하다. 세상에 이런 사전이 있다니?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국어사전을 이리 못 만든단 말인가? 그래서 그 충격은 이내 분노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 충격과 분노가 《표준국어사전》에서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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