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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풍납토성, 무령왕릉, 그리고 권오영

by taeshik.kim 2018.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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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이곳저곳에서 말했듯이, 나한테 《직설 무령왕릉》은 해직이 준 선물이었다. 나는 2015년 11월28일, 연합뉴스에서 해직되었거니와, 졸저는 이듬해 4월 30일자로 찍혀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에서 나왔다. 해직을 축복으로 여긴 나는 이때다 싶어, 기간 미룬 일이나 이참에 마침표를 찍자 해서, 나아가 뭐 이래저래 소일거리 삼아 옛날 원고를 뒤척이며, 이 참에 그 옛날에 사산死産한 무령왕릉 원고 정리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저 졸저가 나왔다. 남들 생각보다 일이 훨씬 빨리 진행된 까닭은 실은 그 원고가 2001년에 이미 완성을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5년이 흘러버렸으니,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이에 무령왕릉을 둘러싼 무수한 변동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원고를 완성해 놓고도 내가 저 책 출간을 미룬 이유는 권오영 선생 때문이었다. 한때 역기를 했다는 그 권오영 말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권오영은 어찌된 셈인지, 국사학으로는 벌어먹기 힘들다 판단했음인지, 이곳저곳 발굴장을 기웃거리게 되고, 그리하여 어쩌다가 최몽룡 눈에 띄어 1987년인가에는 최몽룡과 공동 저자 형식으로 하남위례성에 관한 글 한 편을 탈초하게 되고, 그것을 아마 내 기억에는 《향토서울》인지 《국사관논총》인지 어디에 발표하기에 이르렀거니와, 아무튼 이런 전력을 발판으로 나중에 동아대 전임으로 임용되어서도 고고학 주변을 얼쩡거렸으니, 그러다가 또 어찌하여 나중에 한신대로 자리를 옮겼으니, 바로 이곳에서 운명과도 같은 풍납토성을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1996년, 풍납토성 발굴 연합조사단이라는 요상한 협의체에 이름을 올린 한신대박물관은 풍납토성 조사에 한 다리 걸치게 되고, 1999년인가에는 저 유명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을 낙찰받게 되거니와, 이 과정에서 또 더 유명한 발굴현장 파괴사건을 겪기도 했으니, 이를 통해 그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필설로 형언키 어렵다. 경당지구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그때 나는 이 일을 기록으로 더 확실히 남겨야겠다 해서, 도서출판 김영사와 계약하고는 그것을 일필휘지로 정리해 내려갔으니, 그것이 바로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였다. 


한데 그 진실성 여부는 확언하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 어딘가에서 권오영 선생이 풍납토성 건으로 모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는 말이 들렸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진실성 여부를 나는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걸 본인한테 직접 묻자니, 영 모양새가 이상해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김을 빼버린 셈이 되는구나 하는 막연한 미안함이 꽤 심했다. 물론 아니라면, 괜한 걱정이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무렵, 나는 동시에 무령왕릉 집필에 들어갔다. 한쪽에는 풍납토성, 다른 쪽에는 무령왕릉을 두고 동시 집필에 몰입했던 것이거니와, 하필 무령왕릉이었는가 하면, 2001년이 바로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이었고, 이를 즈음해 나는 연합뉴스를 통해 무령왕릉 특집을 15회 분량인가에 걸쳐 장기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풍납토성이 급하다 해서 그것을 먼저 낸 것인데, 그 무렵 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권오영 선생이 무령왕릉 출판건으로 무슨 출판사와 계약을 한 상태로, 원고를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으나, 이 말을 나는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한창 풍납토성 발굴에 종사하던 신희권한테 들었다. 


이러다간 또 내가 선수를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혹은 미안함이 다대했다. 권오영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듯한데, 이 건은 내가 본인한테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마 풍납토성 현장인지 아니면 학술대회장 같은 데선지 자신은 없으나, 아무튼 그를 직접 만나 무령왕릉 책 출간 계획이 있는가를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는 저도 준비 중인데, 그러면 저는 선생이 책을 내고 나면 내지요 라고 했다. 이런 말에 권오영은 요점을 추리면 그럴 필요 있겠는가? 같이 나오면 더 좋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이었다. 


무령왕릉 출간 계획을 직접 확인했으니, 나는 미루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권오영 책이 나오기를 기다려, 그 이후에 낼 작정이었다. 이것이 2001년 혹은 2002년에 있었던 일이다. 


한데 니미랄, 곧 나온다 곧 나온다던 권오영 책은 하세월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그의 책은 물경 2005년 6월에 이르러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이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잠시만 기다렸다가 내겠다는 내 원고 역시 그만큼 뒤로 미뤄지고 말았으며, 무엇보다 이 기간, 나는 무령왕릉에 대한 열정을 그만 상실하고 말았다. 


2001년 완성한 무령왕릉 원고에는 서문까지 있었으니, 그때 써둔 그 한 구절이 이렇다. 


이 책은 나로서는 올들어 두 번째 단행본이 된다. 지난 2월에는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를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왕성인 하남위례성임을 조명했다. 고고학 발굴기를 겸한 거기에서 나는 무령왕릉 발굴기 집필을 나 자신과 독자들께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금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한데 아주 묘하게도 애초에 그리 목적한 것은 아닌데 결과는 백제 2부작이 되고 말았다. 전편이 풍납토성을 고리로 한성도읍기 백제 493년을 훑어보았다면 이번에는 무령왕릉을 통해 웅진도읍기 백제 63년을 조명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2부작은 고고학 발굴 성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사비도읍기까지 합쳐 아예 고고학 발굴을 통한 백제 3부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3부작은 이전 단행본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공부와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2001년 10월10일 저녁 8시13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그런 책이 해직이라는 축복을 맞아 마침내 세상 구경을 했으니, 묘하도다 묘하도다. 운명이로다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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