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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경주 황성공원 김유신동상의 불알 두쪽

by taeshik.kim 2019.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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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공원엔 독산獨山이란 곳이 있어, 홀로 우뚝한 산이라 하겠지만, 작은 둔덕이라,  

그 정상은 당연히 사방을 조망하는 곳이라, 이곳에 청동상 하나가 우뚝하니, 

김유신金庾信 동상이라. 




그가 누구인지 새삼한 설명은 중언부언을 필요치 않으리라. 

이 동상은 언뜻 그 폼새로 보아 60~70년대 각종 관급공사를 주물하며, 조각계 거물로 군림한 김경승 작품이 아닌가 하지만, 실은 딴판이라  

내가 조각에는 문외한이긴 하나, 저 시대 조각은 남성성 근육질이 유난히 강조된 시대 아니었나 하는데, 
울퉁불퉁 육중한 근육이 박정희시대 이른바 시대정신이 아닌가 한다. 




이 남성성 근육성은 이 동상 말에서 두드러지는데, 보다시피 사타구니 사이로 말방울 두쪽 도드라져 

찰랑찰랑 쌍방울 휘날리며 산하를 호령하는 그런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한 듯하다. 

이 동상 건립 내력은 그 대좌에 동판으로 만들어 붙인 다음 첨부 사진 건립문과 비명에서 확인되거니와 




보다시피 비명은 서기 1977년 9월 일에 전주 이은상이 글을 쓰고, 안동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 
조선시대 유풍이 남아있어서인지, 아니면 그 유풍을 흉내낸다 했음인지 알 수 없으나, 글 지은이와 글쓴이를 각기 본관을 밝힌 점이 이채롭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짧은 건립문을 보면 이러하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명각(銘刻) 휘호(揮毫)하신 이 우람한 기마상은 1975년 4월 17일 동상을 다시 만들어 방향도 바꾸어 세우라는 분부를 받들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김유신장군의 위훈을 오늘에 되새기며, 온 겨래의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조국의 평화통일 과업을 이룩해 나가는 벅찬 앞길에 찬연한 횃불을 밝혀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여기 화랑의 정기 넘치는 서라벌 옛 터전에 자리 잡아 멀리 북녘을 향해 우뚝 세우다.
1976년 7월 15일에 기공하여 1977년 9월 1일에 준공하다. 
세운이 경상북도 
만든이 경주 김만술 

이를 통해 이 동상이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해 제작이 시작되었고, 그에는 호국정신을 구현하며 평화통일에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더불어 경상북도 의뢰로 이 동상을 실제로 제작한 조각가가 김만술이라는 사람임을 안다. 

이 건립문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동상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 시점이 1975년 4월 17일 박정희 지시라는 대목이다. 

이로 보아, 이 자리에는 김유신 동상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에 무슨 불만이 있어 고쳐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방향도 바꾸"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대체 무슨 곡절이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우리는 이 동상 제작이 발의되고, 실제로 건립될 무렵 경상북도지사를 역임한 김수학金壽鶴이라는 사람 입을 통해 듣게 되거니와, 그가 남긴 경주 관련 회고록에 다행히 이 사건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된 까닭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도시재생사업으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라는 것이 있어, 이 사업에 관련한 생존자들이 경주개발동우회라는 친목 단체를 결성하고, 내친 김에 그들의 회고록을 모아 정리한 책자 하나를 1998년 고려서적(주)라는 출판사에서 펴냈으니 《그래도 우리는 신명바쳐 일했다》가 그것이라, 경주개발계획을 들여다볼 적에 이 회고록은 성전과도 같은 위치를 검거한다. 

이 경주개발동우회 이 책자 간행위원장이 바로 김수학이라, 이 책자에다가 김수학은 '경주개발 고금古今'이라는 제목으로 경상북도도지사 재직시절 경주개발에 얽힌 이야기들을 정리했으니, 이 회고록에 문제의 김유신 동상 재건립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엿보인다.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변 황성공원에 유서 깊은 독산이 있다. 이 산은 모양이 큰 고분 같기도 하고, 작은 인조산 같기도 한데, 왜병과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 이 산위에는 김유신장군 기마상이 북쪽 하늘을 노려 보면서,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원래 이 기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대통령께서 포항종합제철을 방문하시는 길에 이 동상을 지나면서 기마상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연유를 내게 물었다. 동쪽을 향하든 서쪽을 향하든 보통사람은 관심없이 지나치는 것이었다. 나도 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아마 옛날 왜구를 상기하는 뜻에서 일본을 향하게 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민족의 통일을 생각하고, 광활한 대륙을 호령했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는 뜻으로 북쪽을 향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말을 듣고 보니, 대통령 말씀대로 북쪽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마침, 시멘트 동을 입혀 만든 칼에 금이 가 재건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던 터라 순동을 개조하면서 방향으로 북쪽을 향하게 했던 일이 기억난다.(113쪽)

김수학 증언에는 이런 지시가 언제인지 시점이 드러나지 아니하나, 저 동상 건립문을 통해 그날을 확정한다. 

덧붙여 기존에 이 자리에 같은 김유신 동상이 있었고, 그것이 시멘트에 구리물을 부어 만든 것이었음을 추찰한다. 다만, 이 시점에서 그 기존 김유신 기마상이 같은 김만술 작품인지는 내가 모르겠다. 

그렇다면 김만술은 누구인가? "김만술+황성공원+김유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두들기니 서라벌신문과 경주신문과 같은 경주지역 기반 신문들에서 그의 행적을 정리한 기사들을 더러 만나니, 이를 종합컨대 김만술(1911~1996)은 호를 수월水月이라 하며, 경주 노동동에서 태어나 계림보통학교 재학 시절 점토불상을 만들어 출품한 일이 계기가 되어 조각가 길로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계림보통학교 졸업 후 곧바로 상경해 서울 종로에 있던 서울미술학교(조각과 김복진 교수)에서 1930년부터 2년간, 혹은 1년간 조각 기본을 익히고는 일본으로 건너가 1942~1944년 하나코 지츠조 조각연구소에서 수업했다고 한다.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박군의 상과 제23회 같은 대회에서 와다나베씨의 상으로 입선한다. 

해방 이후에는 1948년 제1회 국전에 소년 두상으로 특선하고, 제2회 대회에서는 흉상으로 무감사 입선을 했다고 한다. 경주예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힘쓰며 또한 개인적으로 1956년에 신라불교조각연구원을 설립한다. 

그는 불교조각과 기념조각을 많이 남겼으니, 예산 수덕사 후불 조각과 본존인 석가여래좌상, 불국사 천왕문 내 사천왕상, 보문사, 황성사, 망월사, 황룡사 등의 불상과 황성공원 독산의 김유신 장군 동상,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신사임당 동상, 화랑 원화상, 경주 충혼탑, 경북 종합운동장의 성화 동상, 나이팅겔 동상 등의 그의 손길에서 탄생했다. 그는 꽤 유명한 조각가였던 듯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기도 한다. 

이런 그를 흔히 신라 석공의 후예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상 그의 행적은 아래 두 기사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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