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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아쓰타네(평전독윤<平田篤胤>), 신도(神道), 적현태고전(赤縣太古傳)

by taeshik.kim 2018.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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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田篤胤> 


2005.05.28 23:58:35


히라타 아쓰타네(평전독윤<平田篤胤>)


1776.9.25~1843.10.4 : 안영(安永) 5~천보(天保) 14년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주창한 에도시대 말기 일본 사상가로, 천황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왕정복고를 주창하는 존왕파(尊王派)에게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한다. 


그는 號를 이부키노야(氣吹舍) 혹은 마스게노야(眞菅乃屋)라 했다. 아버지는 出羽國 아키타(秋田) 번사(藩士)인 大和田淸兵衛 平田祚胤이다. 祿高 100석인 平田祚胤에게 그는 넷째 아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하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어려서는 아사미 게이사이(?見絅?.1652~1712)의 학풍을 잇는 中山靑我에서 한적(漢籍)을 배우고 여기에서 國學을 닦음으로써 나중의 古道 硏究의 실마리를 열게 된다. 


20세에 탈번(脫藩)에서 에도(江戶)로 가서 苦學한다. 이후 그의 생활 대부분은 에도를 근거로 하게 된다. 서기 1800년, 관정(?政) 12년, 25세에 備中國 마쓰야마(松山) 藩士인 병학자(兵學者) 히라타 아쓰야츠(平田篤穗)의 양자가 되어 藩主板倉家에서 봉직한다. 


享和 3년까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8세 때 『呵妄書』(1803)를 써서 유학자인 다자이 슌다이(태재춘대<太宰春台>. 1680~1747)를 비판하고, 1804년(文化 원년)에 眞菅乃?를 개업하고,그리고 本居宣長의 학문을  배웠으며 그 뒤 근면하게 학업에 힘써 『新鬼神論』『古道大意』『俗神道大意』『西籍槪論』『出定笑語』『伊布伎於呂志』『志都乃石屋』『靈の眞柱』를 완성했으며, 그런 다음에도 『王?』『古史徵』『古史傳』을 구상하게 된다。


『靈の眞柱』 간행은 널리 노리나가(宣長) 門의 주목을 끌게 된다. 이 저술에는 服部中庸의 영향도 있다. 그 뒤에 그의 문하는 에도의 下町을 중심하고 해서 서서히 관동(關東)으로 파급되게 된다. 그 뒤에도 저술을 기획하고 민속 기층으로 파고들려 했으나 幕府에 의해 秋田으로 추방됐다.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그는 불교와 유교가 습합된 神道를 비판하고, 이에 따라 나중에는 신불(神佛) 분리 혹은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발전해 나간다.


우창동마(羽倉東磨)   강부진연(岡部眞연)  모토오리 노리나가<본거선장<本居宣長>. 1730~1801)과 함께 국학(國學)  4대인(大人)이라 일컬어진다.


원래 주자학자였으나 신도(神道)로 전향해 모토오리 노리나가(본거선장<本居宣長>) 제자임을 자칭했다. 모토오리는 일본의 초기 전통과 문화에서 일본 정신의 진정한 표현을 찾으려고 애쓴 고쿠가쿠(국학<國學>)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사람. 


모토오리 학파에 비해 현저히 신비적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된다. 그에 따라 말년에 접어들수록 그는 천황을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 앉혀놓고 쇼군(將軍)이라는 공직을 통해 일본을 다스린 도쿠가와(德川) 정권을 더욱 더 비판하게  된다. 히라타는 이런 정치적 활동 때문에 고향에 유폐된 채 여생을 보냈다.


히라타는 일본이 신들의 땅으로서 당연히 우월성을 갖고 있다는 신념을 열성적으로 설파했다. 그는 신들이 일본의 왕통을 통하여 일본에 '참된 길'을 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국수주의와 외국 혐오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문으로 번역된 책을 통해 알게 된 서양과학의 일부 요소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쓴 신학저서의 몇 가지 측면을 자신의 신도 신학에 적용했다.


이런 성향을 대표하는 그의 저작으로 《적현태고전(赤縣太古傳)》이 있다. 적현(赤縣)이란 중국의 별칭이며 '태고전'(太古傳)이란 원시 神道 이야기를 뜻한다.  여기서 히라타는 고사기에 사용되고 있는 중국 문헌자료를 색출함으로써 고사기의 신화전설을 중국고대의 종교 사상 신앙과 역사적으로 대응케 하고 양자의 비교검토를 시도했다. 이 점은 동아시아적인 규모의 결론을 기획하고 있다고 하는 점은 지금도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에 대한 일본 국내의 주석 작업이 시도되는데 그 주인공은 에도 중기의 尾張藩 河村秀根 부자였다. 이들은 <<일본서기집해>>(日本書紀集解)를 완성하는데 이는 한자로 씌어진 일본서기에서 어떤 기술이 중국문헌에서 따온 것인가를 각각 주기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이 똫란 일본고대의 신화전설에 대해 중국고대의 종교사상신앙을 대응케 하고 양자를 비교검토하기 위한 기초문헌자료로서는 지금도 훌륭한 성과로 평가되어도 좋다.


河村秀根이 尾張에서 일본서기 주석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명화(明和) 2년(1765) 무렵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宇佐見惠가 《왕필주노자도덕경(王弼注老子道德經)》을 간행한다(명화 7년<1770>)).


河村秀根 부자와 宇佐見惠가 활동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에도기 중국학의 문헌 실증주의가 피크를 맞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중국학 연구 성향을 보면 압도적인 유학 일변도라고 할 수 있다. 河村 부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日本書紀集解 주석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그런 특성은 용이하게 드러난다.


골수 유학자인 河村 부자와는 달리 국학자로서 신도학 연구자인 平田篤胤은 어떤가 하면 유학자들이 경시하는 주술 종교 관계 문헌, 즉, 공자가 말한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책에 대해서도 훌륭한 감수성을 보이고 있다. 즉 記紀 시대와 그 찬자들이 지니고 있던 주술종교적 神經의 세계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이 그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篤胤의 중국학을 대표하는 《적현태고전》에는 다수의 위서(緯書)류 문헌이 인용되고 있고 나아가 《노자중경(老子中經)》이나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 혹은 《악독명산기(岳瀆名山記)》와 같은 도교 관계 문헌이 구체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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