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4) 목간의 보고 함안 성산산성(1)
발굴보고서에서 만난 신라 목간
문화재 기자 생활 초창기에 만난 유적이나 유물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곳으로 함안 성산산성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그 이전까지는 전연 존재조차 모른 이 산성과 조우하기는 1999년이다. 이미 17년이나 지난 과거이니 그 조우한 계기는 아련하지만 기억을 되살리건대 그때 막 연세대 교수로 임용된 하일식을 통해서였던 듯하다.
신라사 전공인 그가 모교 교수로 임용되기까지는 내가 알기로 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럭저럭해서 교수로 임용되었거니와, 그 직후 어떤 일을 계기로 내가 그의 연구실을 들린 일이 있다.
그 자리서 그 무렵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막 발간한 《함안 성산산성》 발굴보고서를 보여주면서 이에 재미있는 성과가 수록되었다고 하기에 보니 신라시대 목간 25점이 수록됐더라.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다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문을 나섰다. 그 직후 어디에선가 이 보고서를 나도 구해다가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보니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그 결과 좀 뜻밖인 점이 그것이 발굴된 시점이었다.
보니 1991∼94년 창원연구소가 성산산성를 발굴조사하는 중에 그 내부 연못터 뻘층에서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찾았다면 이미 언론에 틀림없이 보도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이는 전연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발굴 보고서 기술 내용을 토대로 기사 작성에 들어갔으니, 이렇게 해서 1999년 5월 15일 ‘함안 성산산성에서 신라 목간 무더기 출토’라는 제하 소위 단독 기사를 송고할 수 있었다.
성산산성 목간은 이 기사를 통해 마침내 소수가 독점하는 유산에서 국민의 유산이 되었다.
기사는 “아라가야阿羅伽耶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으며 6세기경 신라에 편입된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城山山城. 사적 67호)에서 신라 중고기中古期 지방통치 체제 연구에 획기적인 목간木簡이 무더기로 발굴돼 공개됐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보고서 발간 당시 창원문화재연구소장은 신창수. 경남 창원에 본부를 둔 이 연구소는 나중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면서 기사는 이런 내용이 새로운 사실임을 밝히고자 “원래 이들 목간은 92년과 94년에 각각 발굴된 것으로 그동안 이런 사실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 적외선 TV 카메라 시스템을 이용한 자세한 목간 글자 판독 등의 절차를 거치고 난 뒤 이번에 관련 사진과 함께 전면적인 공개가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이런 것들이 무에 중요한가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뉴스라는 측면에서는 그런 사실이 새로이 알려졌는가 아닌가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미 공개된 것이라면 뉴스로서의 가치가 급감되는가 하면, 그럴 가치조차 상실하고 만다. 뉴스(news)라는 말 자체가 새로운 소식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기사는 그 결과 “일부 글자가 판독에 어려움은 있으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서기 250∼640년이라는 추정치가 나온 이들 목간을 통해 지금의 경북 김천 개령면 일대를 가리키던 감문甘文이나 본파本波(경북 성주읍), 하기下幾(경북 풍산읍), 급벌及伐(경북 순흥면) 등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기록이나 다른 금석문에서도 확인되는 지역이름이 확인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지명도 다수 등장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나아가 “이들 목간에는 울진 봉평비(524년 건립 추정)나 명활산성비(551년) 같은 다른 신라 중고기中古期 비석에도 나타나는 일벌一伐을 비롯한 신라의 벼슬이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면서 “특히 지금까지 봉평비 1곳에서만 확인됐기 때문에 그 실체가 수수께끼 같은 ‘노인奴人’이라는 글자가 목간에서도 발견됨으로써 노인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기사에서도 지적되었듯이 그간 학계에서는 대체로 울진 봉평비에 나타난 노인이나 노인촌奴人村이 이 비가 발견된 울진이 나중에 신라에 복속된 지역이며 노예 ‘노奴’자가 들어간 점을 볼 때 대체로 노인은 신라가 새로 편입한 변병지역의 지방민이라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따라서 울진과 비슷하게 나중에 신라로 복속된 변방지역인 함안에서도 노인이라는 글자가 적힌 목간이 나옴으로써 기존 학계 통설이 더욱 힘을 얻게 됐다”고도 했다.
더불어 “연구소는 보고서에서 지금의 경북지역에 있는 지명들이 목간에 다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 복속된 함안지역에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여러 지방의 인원을 동원해 산성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보고서는 신라 중고기 행정지명이 대부분 성城 또는 촌村으로 이뤄진데 비해 성산산성 목간에서는 벌伐이라는 글자가 다수 등장하고 또한 촌村보다 앞서 글자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벌이 촌보다 규모가 더 큰 집단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고 덧붙였다.”
글자 그대로는 글씨를 쓴 나무인 목간은 종이 발명 이전, 혹은 그 이후에도 서사書寫 재료로 널리 이용됐다. 그 간편함이 어느 필기 도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성산산성 목간은 어떤 성격을 지닐까? 이 보고서에는 그것을 분석한 연구자 고찰이 수록됐다. 그것을 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들 목간 분석에 참가한 김창호 경주대 교수는 글자가 적힌 목간 25개 가운데 16개에 사람이름이 등장하며 또한 이 중 왕경인王京人이 하나도 없고 출신지방 이름과 함께 전부 지방민만 나온다는 점에서 이들 목간은 조선시대 호패처럼 지방민에서 산성축조를 위해 차출돼온 병사들의 신분증 정도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기사가 나가자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그 산하 창원문화재연구소가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전연 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합뉴스에 보도가 되니, 당황했던 것이다. 창원연구소에서도 별도 보도자료 배포를 생각지도 않은 마당에 느닷없이 언론에서 치고 나가니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지금은 은퇴한 당시 창원연구소장 신창수가 나한테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특유의 장난기 섞인 말투로 “뭐가 새로운 사실이라고 그래. 발굴할 때 다 공개했구만”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대뜸 “공개는 무슨 공개요? 아무도 모르더만”이라 받아치고 말았다.
그의 말은 발굴 사정을 아는 일부 사람한테만 보여줬다는 뜻이지 결코 그것을 외부에 알린 적은 없다.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목간 발굴 사실이 단순히 보고서로만 공개되었다면 조용히 지나갔을 일이 언론을 통해 크게 취급되니 사정이 달라졌다. 창원연구소도 이제는 뭔가 대응을 해야 했다. 특히나 새로운 문자 자료 출현을 갈망하는 한국고대사학계가 가만둘 리 만무했다. 이들은 새로운 문자자료가 출현하기만 하면 벌떼처럼 달라 드는 습성이 있다.
그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심하므로 내가 그 심정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때마다 이들이 보이는 행태는 대형 사건사고 현장에서 특종 경쟁을 벌이는 기자들보다 더 심각한 병적인 집착에 다름 아니다. 성산산성 목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라 들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급기야 창원연구소가 한국고대사학회와 공동으로 새로이 공개된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대한 한·중·일 국제학술대회를 급히 마련한 이유다. 한데 이 자리에서 한국 고대사학계 연구자들이 그야말로 처참하게 망신을 당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2016.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