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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사직, 그 닐리리한 이야기들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1. 2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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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제사의 양대 산맥이라는 종묘宗墓와 사직社稷.

그래서 동아시아 전근대 저 둘은 국가 혹은 왕실과 동의어였다. 

같은 귀신을 섬기지만 종묘가 조상신이라는 人을 내세운 데 견주어, 사직은 땅, 곧 부동산이었다. 

조상신은 하늘과 동격이었다. 그 조상신을 상제上帝라 했고, 그 왕조 창업주는 언제나 그 상제와 동렬로 배치되었다. 

한데 조선은 스스로 하늘을 포기해 버리고, 그 하늘은 중국 천자만이 독점하니, 그 하늘 아래에다가 이성계를 필두로 하는 잡신을 시다처럼 배치했다. 

하늘을 섬기지 못하면 땅도 섬기지 못해야 하는데, 이에서 그만 착란이 일어나, 사직은 그대로 두었으니 이 또한 웃기는 발상이라 하겠다.

아버지는 버리고 엄마만 선택했기 때문이다.

저 국조오례의를 보면 종묘는 저 당시만 해도 단촐했음을 본다.

조선이 건국한지 10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 섬겨야 하는 조상신 귀신도 몇 되지 않아 저랬을 것이다. 

저것이 훗날 왕조가 오백년이나 엿가락처럼 늘어짐으로써 한정없이 늘어나 지금과 같은 몰골이 되고 말았다. 

 



조선 왕조는 이른바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해서,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라는 문헌에 기초한 왕도 설계도에 따라, 왼쪽에는 종묘를, 그 반대편 오른편에는 사직을 배치해 1395년에 완성했으니, 이에는 음양사상이 짙게 작동한다. 

음양설에 의하면 왼쪽은 숫놈, 그 반대편 오른편은 암놈이었다.

그래서 천신天神을 필두로(물론 조선왕조는 천신을 포기했지만) 이성계 까라 이방원 이도 마데 등등으로 이어지는 숫놈 왕들을 잔뜩 갖다 놓은 반면(물론 왕비라 해서 암놈도 짝지워 놓기도 했다),

그 반대편에다가는 자궁을 대표하는 토지신들인 사社와 직稷을 배치했다. 

社는 하늘을 의미하는 示와 흙을 의미하는 土가 이룩하는 회의자라, 저 土에서 토지신을 의미하게 되거니와, 곡물신은 왜 하필 대표 주자가 직稷, 곧 기장인가?

벼? 나락? 웃기고 자빠졌네. 쌀밥 언제부터 먹었다고?

물론 저 사직, 곧 사와 직은 황하 문명권에서 직수입한 까닭에, 그리고 황하 유역은 그 남쪽 장강 문화권이 벼농사 중심인데 견주어 황토고원 잡곡 생산의 문화를 반영하거니와, 그 대표주자가 바로 기장이었다. 그래 조 수수 기장할 때 그 기장 말이다! 

한반도 역시 벼농사라 하지만, 벼농사? 이 저주받은 한반도는 벼농사랑 애초에 생득으로 맞지 아니했다.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새니 나를 다 잡아 본류로 돌린다. 

암튼 종묘는 왕실 조상 신주, 곧 귀신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신주는 무형이다. 그 조상을 상징화하는 장치로 지방으로 상징하는 신주 말고도 어보御寶와 어책御冊이 있었다.

어보는 천명을 받은 군주라는 도장!이었으니, 너 왕 해라 하늘이 명했다 해서 그것을 상징하는 인장이며, 어책은 도장만 있으면 밋밋하고 가오가 살지 않으니, 그런 사실을 장황히 적기한 공증 문서다. 

이는 완연한 도교 발상이다. 저 하늘을 관장하는 최고신 천황대제天皇大帝가 있고 그 아래 졸개들은 그에게서 인장 찍힌 공증문서를 받아 시다바리들이 다른 쫄개들을 통치한다는 그 도교 신학 말이다.
 



스스로 중국 천자 졸개를 선언한 조선왕조는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廟'를 만든다는 각종 의례서 규정을 들이밀며 현재 왕을 기준으로 본래는 다섯 명만 봉헌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뒷간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마음이 같은가?

또 이걸 운영하다 보면 현실을 전연 반영하지 못한다. 

그래 제후 5묘라 했는데 골치아픈 문제에 봉착한다.

왕조가 그 전에 망해버리면 간단한데, 고려 조선왕조처럼 500년을 가고, 고구려 백제처럼 700년을 가며, 신라처럼 천년을 가면 우째되는가?

어지럽다!

저 원칙에 의하면 제후만 해도 조상 줄세워 다섯 분만 모시고는 그 윗대는 신주를 태워버리고 사당은 철거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가?

창업주 이성계가 5대를 벗어났다 해서 던져버리겠는가?

세종은 언터처블 넘버원 위대한 군주인데 어찌 사당에서 쪼까낸단 말인가?

이에서 바로 창업주 문제랑 중흥주 문제가 돌발한다.

창업주는 시조이니 버릴 수 없고, 중흥주는 가문을 빛낸 불세출이니 어찌 버린단 말인가? 

이런 문제에 봉착한 사대부 가문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출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천위不遷位다.

대수가 먼 조상이지만, 우리 가문을 더없이 빛낸 위대한 조상님은 결코 신주를 철거하지 않는다! 

예컨대 퇴계가 위치한 진성이씨 가계에서 어찌 퇴계를 버린단 말이며, 율곡이 정좌하는 덕수이씨 정맥을 이은 가문에서 율곡이 먼 조상이라 해서 퇴출한단 말인가? 

조선왕조? 

저 웃기는 왕조는 닐리리 짬뽕이라, 하도 골치 아프니 '야지리' 정책을 취하게 된다.

5대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고 한꺼분에 종묘에다가 차곡차곡 돼지고기 저미듯 다 모신다! 

그렇게 해서 이성계 이래 심지어 꿔다논 보릿자루 정종까지 포함해 역대 왕 신주라는 신주는 하나씩 칸막이 쳐서 염가 분양을 하게 되는데,

그때 조선왕조가 철근콘크리트를 알았더래면 지금처럼 엿가락 늘이듯이 죽죽 옆으로 퍼지지 않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부양해서 아마 지금쯤 142미터에 이르렀을 것이다. 

왜?

그때라고 쓸 만한 부동산이 없어서였으니, 옆으로 퍼지는 만큼 귀신이 잡아먹는 땅덩어리는 우후죽순으로 불어만 갔다.

이걸 타개할 방법은 오직 철근콘크리트 단독 고층 주택이 있었을 뿐인데, 아쉽게도 저 시대 우리 조상님들은 건물을 높일 실력과 기술이 없어, 배째! 정책을 채택하니 그래서 저리 죽죽 굼뱅이가 늘어나서 지렁이가 되고 말았다. 

위대한 유산? 웃기고 있네.

다 백성 고혈 쥐어짜낸 수탈의 상징일 뿐이다. 

저 종묘는 찬란한 유산이 아니라 저 시대 수탈을 상징하는 다크 헤러티지dark heritage다.
 



사직단과 종묘 배치를 보면 경봉궁을 중심으로 양날개에 포진했음을 본다.

예서 기준은 살아 있는 왕이 있는 경복궁이며, 그 왕은 언제나 남쪽을 향해 똑바로 응시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보는 왕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사직이 되며, 왼쪽이 종묘가 된다. 

종묘와 사직은 그 양쪽에 위치한다 했는데, 그렇다면 그 양쪽 위치도 문제다. 

귀때기 쪽인가 입술 쪽인가 가슴팍인가?
 

 
놀랍게도 조선왕조 이데올로그들은 양 팔로 생각했음을 본다. 

나아가 사직단과 종묘는 경복궁 중심 이격 거리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위도에 위치함을 본다. 

예서 문제는 사직단이었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더 뻗어나간 지점이어야 했지만, 산이 막아 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골짜기 적당한 지점을 물색해 철퍼덕하니 주저앉게 된다. 

애초 창덕궁은 이방원 시대에 내가 살 곳이라 해서 딴살림 차리고 나간 곳이라, 이거 처음 저 자리다 궁궐 만든다 했을 적에 실은 신하들이 안 된다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어야 한다. 

어디 감히 조상님들 등때기에다가 비수를 꽂는단 말인가?

모르겠다. 이방원이 그렇게 이성계가 싫어서 저리 했는지도 말이다. 

아무튼 저렇게 해서 기형이라 할 수밖에 없는 체제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6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반복될 줄이야? 

선조의 위대한 유산?

이 딴 얘기 함부로 하지 마라. 

위대하긴 뭐가 위대해?

그냥 사람일 뿐이다. 

종묘가 위대한 이유는 다크하기 때문이다.

저 시대가 위대했다면 우린 다시 저 시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저 다크한 종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가 성립하면서 실은 쏵 밀어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화한 국립묘지가 되었어야 했다.

동작동 국립묘지가 갈 곳은 실은 종묘 자리였다.

 

[삐딱선을 탄 종묘] (2) 사직단도 삐딱선을 탔다!

https://historylibrary.net/entry/jongmyo-3

 

[삐딱선을 탄 종묘] (2) 사직단도 삐딱선을 탔다!

말은 그리 했지만 짚이는 게 있었다. 직감이라 하는 요물인데, 이런 내 직감이 틀린 적은 거의 없다. "그래? 종묘가 그렇다면 사직도 그럴 텐데? 왜 똑같은 귀신집이잖아?"난 내가 생각해도 이럴

historylibr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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