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숙권](4) 추가 학살을 막은 이는 중국어 군관! 그에 투영한 자신
공무원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어숙권은 분명 명종 즉위년인 1545년 발생한 황당선荒唐船 전라도 고흥 표류 사건과 그에 따른 왜적 오인으로 인한 대규모 학살사건이 일어났음을 이야기하면
이 사태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다시 말해 추가 학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사람이 버벅이 중국어를 하는 당시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김세한金世澣이었음을 대서특필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 사건이 미친 여파가 상당히 커서 그 발생과 처리 과정이 명종실록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보인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 사태 해결에 김세한이 관여했다는 언급 자체가 없다.
어숙권이 말한 그 김세한이 저 어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관으로 실록 곳곳에 등장하기는 하나 이 사건 그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다.
함에도 어숙권이 이 사태의 국면을 전환한 인물로 김세한을 거론하는 한편, 그의 무기가 비록 버벅버벅 중국어이기는 해도 그 버벅 중국어가 더 많은 희생을 부를 수도 있었던 사태를 수습하는데 결정적이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를 묻는 데서 어숙권이 이 패관잡기를 왜 저술했는지 그 저의가 비로소 폭로된다.
김세한이 어디서 중국어를 어떤 과정을 거쳐 습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독학으로 공부한 듯하고 이를 무기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에 군관 자격으로 끼기도 했다.
어숙권 증언을 보면 그 조금 아는 중국어로써 중국 사람들과 어케든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피눈물 나는 노력이 훗날 비록 말석이기는 하나 당당히 그를 당상관으로 끌어올리는 바탕이 되었다.
아무리 천대받았다지만 당상관이냐 아니냐는 천양지차가 났다.
중국어는 김세한에게는 무반이라는 이유만으로 극심한 차별을 받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가 살아남는 방법이었고 출세하는 수단이었다.
이것이 바로 어숙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중국어 통역 우습게 보지 말라.
나도 중국어 역관이다!
이것이 패관잡기의 선언이었고 어숙권의 외침이었다.
내가 보건대 패관잡기는 오독되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를 간파한 사람이 없다.
*** previous article ***
[어숙권](3) 중국 표류민 학살사건, 그 무대는 전남 고흥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5%87-574
[어숙권](3) 중국 표류민 학살사건, 그 무대는 전남 고흥
가정 을사년, 곧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중국 복건福建 사람들이 탄 배가 정박한 일과 그에 따른 대규모 학살사건이 일어난 무대를 패관잡기는 호남 흥양興陽을 지목했거니와, 그렇다면
historylibra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