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고열왕과 춘신군, 그리고 무왕돈 1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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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 성왕成王 때 웅역熊绎이 초군楚君으로 봉함을 받으면서 초나라 역사는 시작한다.
사료에 따르면, 외딴 형산荆山에서 그는 장작을 몰고 낡은 옷을 입고 산림을 개척했으며, 복숭아나무 활과 가시나무 화살은 그가 주왕에게 바친 공물이다.
주 성왕이 기산岐山 남쪽에서 제후들을 불러모을 때 초나라는 단지 마당에서 화덕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회의에 참석할 자격도 없었다.
그런 초나라가 훗날 점점 강성해지면서 남방 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시대 후기가 되면서 초나라를 멸망을 향해 달려간다.
여러 차례 북방 秦나라에 패배하고, 그러면서 수도 또한 오늘날 호북湖北 형주荆州에서 하남성河南성 주구周口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63년, 오랫동안 진나라 서울 함양咸阳에서 인질로 있던 초 경양왕顷襄王의 아들 웅완熊完은 황헐黄歇의 도움으로 무사히 초나라로 돌아와 즉위하여 초왕이 되었다.
후세에 초나라 고열왕考烈王이라 일컫게 되는 이 군주는 춘신군春申君 황헐을 영윤令尹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여 조赵나라를 도와 한단의 포위邯郸之围를 풀고 노鲁나라를 병합하여 초나라가 한때 중흥했다.
유명한 "모수 자천毛遂自荐" 중에서 조나라 출신 모수가 설득한 사람은 바로 초나라 고열왕이다.
기원전 241년, 춘신군은 전국 역사상 마지막 합종合纵을 조직하여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를 수춘寿春, 즉 오늘날의 회남시淮南市 수현寿县으로 옮겼다.
기원전 238년, 재위 25년을 맞은 초나라 열왕烈王이 사망하고 춘신군도 권신 이원李园에게 살해당하면서 초나라의 마지막 영광은 점차 어두워졌다.
어린 초 유왕幽王의 10년 통치를 거친 후, 초 고열왕의 또 다른 막내아들 초 애왕哀王은 재위 두 달 만에 이원李园과 함께 마지막 초왕에게 부추되어 처형되었다.
비록 초나라가 기원전 224년에 20만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멸망시키려던 진나라 장수 이신李信이 대패하고 돌아왔지만,
이듬해 60만 군사를 이끈 진나라의 노장 왕전王翦을 상대로 800년 동안 이어온 초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
무왕돈 1호묘武王墩一号墓 주인은 누구일까?
시계추는 고열왕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