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aboutHistory 인터뷰] 이태리 한국학 부흥을 꿈꾸는 안종철 교수
그가 내민 명함을 보니 소속은 베니스 카포스카리 대학 Ca'Foscari University of Venice 이며
그 대학 현 소속 직책은
Department of Asian and North African Studies에서 Associate Professor 라 하는데
앞은 쉽게 말해 아시아북아프리카학과로 이해하되 본인은 저 중에서 북아프리카를 뺀 나머지를 동양학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한다.
저 Department가 우리 대학 시스템으로 치면 단과대학 칼리지 개념이라 하는데
학과 혹은 학부 편제가 우리랑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생각하는 학과는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구별된다 한다.
현재 저 대학 아시아학부, 곧 동양학에서는 모두 10개 프로그램이 있어 한국학도 개중 하나라 한다.
아무래도 중국학과가 입학생이 가장 많아 200명 정도라 하고 그 다음으로 일본학과가 180명 정도가 되며 신생급인 한국학도 의외로 많아서 100명 정도나 된다고 한다.
저 단과대학 혹은 학과에서 그는 Associate Professor라 이를 우리 개념으로 조교수라 해얄지 부교수라 해야할지 아리까리하나 그 자신은 부교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한다.
그는 이미 2022년 10월에 테뉴어를 받아서 70세 정년을 확보한 상태다.
"우리 교수 정년이 65세지만 여긴 70세죠. 제가 도망가지 않는 한 70까지는 걱정 없어요."
연봉은 대략을 말해주었지만 밝히기는 곤란하다.
다만 그도, 나도 생각보다는 높아서 의외였다.
"이래서 이탈리아가 문제일 수 있죠. 하하. 제가 이탈리아 교육부 공무원이거든요.
그렇지만 절반, 정확히는 40프로인가를 세금으로 떼 가서 실수령액은 훨씬 줄어들죠. 다만 그 세금이 결국 의료보험 교육비로 충당되는 셈이죠."
그는 현재 고교생 아들 둘과 함께 베네치아 인근 파도바라는 도시에서 거주한다. 딸은 이미 직장에 다니고 있단다.
부인은 한국서 오가는데 반기러기 아빠 같은 느낌도 있지만 아이들까지 나와 있고 부인도 자주 그리고 오래 이태리에 머무는 편이라 하니 기러기 남편 기러기 아빠랑은 전연 결이 다르긴 하다.
"두 아들도 다행히 이태리를 좋아하네요. 그네는 아마 외국에서 자리를 잡겠지요. 그네들 선택이 중요하죠. 저는 꼭 한국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Jong-Chol AN, 안종철安鍾哲.
외모는 어디 캐리커처에서 익숙한 느낌을 준다.
sns를 통해 접촉할 때는 큰바위얼굴 계통이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보단 작았다. 옥동자형이다.
며칠 만나 이야기해 보니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고 무엇보다 부담이 없는 그런 타입이 아닌가 한다.
경상도 특유한 액센트는 여전하나 이야기에 서스럼이 없다,
본인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넋두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이번 유럽 여행에 이태리를 왔다가 어찌하여 연락이 닿았고 파도바가 좋다 해서 인근 베로나로 가려던 여정을 바꾸어 나는 파도바로 와서 원치 않는 폐까지 끼치게 되었지만 참 이것저것 많이 챙겨줘서 눈물나도록 고맙다.
내친 김에 인터뷰를 했으면 싶다 해서 지난 며칠 동행하며 나눈 이야기들을 곁들여 인터뷰 담을 정리한다.
우선 족보부터 따졌다.
나는 안동 출신으로 알았지만 영주 읍내 출신이고 영주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국사학과 89학번으로 들어갔다.
"우병우 아시죠? 그 양반이 제 고등학교 선배세요. 그 분이 학번은 84인데 국민학교를 두 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실제는 김 기자님과 같은 양띠에요. 참 안 된 선배님이세요."
"서울대 국사학과 나와서 모든 사람이 잘 풀린 건 아니지만 결국은 그래도 국내서 자리를 잡던데 어찌하다 유럽까지 오셨소"라는 질문에 개인사가 좌르륵 나온다.
"제가 석박사를 모교서 했어요. 지도교수님은 김 기자님도 잘 아실 이태진 선생님이시구요.
석사는 고종대 한일관계로 했고 박사는 일제시대로 도망쳐서 1930-40년대 한미관계사로 했어요. 선교사 자료랑 국무부 자료를 주로 이용해서 (박사논문을) 제출했어요.
저는 사실 일본으로 유학 가고 싶어 일본어도 열심히 공부했어요. 한데 이태진 선생님이 죽어도 일본은 안 데요."
이 대목에서 내가 말을 끊고선 "그러는 당신은 맨날맨날 와다 하루키니 하는 일본친구들이랑 노시더만요" 하며 껄껄 웃었다.
국사학과 89학번 동기로 염복규 서울시립대 교수와 조선사상사 전공 강문식 선생, 노관범 규장각 연구원, 고전음악 전공 김병오 선생, 김용태 동국대 HK 교수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왜 이태리까지 오게 됐을까?
"제가 박사를 하고 또 다른 학위가 있어요. 하와이대학 로스쿨을 가서 국제법을 공부했어요. 법학박사라 하면 좀 그런데 아무튼 직업학위가 있어요."
이 대목에서 짚이는 대목이 있어 이태진 선생이랑 아주 가까웠고 함께 전후청산운동을 한 서울대 법학과 국제법 전공 고 백충현 교수가 관여하지 않았나 했더니
"물론 백 선생님도 잘 알지만 하와이로 가게 된 것은 실은 우연이었어요. 제가 국제학술대회 통역을 느닷없이 하게 되었는데 그때 존 반다이크 선생이며 슐츠 선생이니 하는 하와이대 선생님들을 알게 된 거에요. 그 인연으로 하와이로 건너갔어요."
그때가 2011년. 1999년 결혼한 그는 당시 이미 1녀2남 가장이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지만 온 식솔을 다 거느리고 간 미국 생활비가 문제였다.
"미국 가면서 빼낸 전세금으로 버텼죠. 전세금 다 생활비로 들어갔어요."
아마 하와이로 가기 전일 듯 한데 인하대에서 3년짜리 연구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와이 체류 중인 2014년 3월, 느닷없이 독일 튀빙겐 중국 및 한국학과 주니어 교수로 채용되면서 인생항로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누가 추천한 것도 아니고 제가 우연히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한 거예요. 공고는 그 전해 연말에 나고 제가 서류심사에 합격했다 해서 독일로 가서 2박3일 머물며 면접까지 했단 말이죠.
면접이 좀 독특했어요. 한 시간 정도 진행했는데 영어로 했죠. 교수들 앞에서 강의도 하고, 또 학생들이 평가도 하더라구요."
그는 면접하러 독일에 체류한 일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2013년 12월 1읿부터 3일까지 독일에 있었죠.
제가 지금 국산 빨간 넥타이를 하고 있는데 그날 면접장에도 빨간 외제 넥타이, 가장 비싼 넥타이를 매고 들어갔죠. 내가 하고 싶은 말 맘대로 떠들었어요."
비공식 통로이긴 했지만 합격 통보를 받은 날짜도 정확히 2014년 3월 17일로 기억한다.
문제는 4월 1일이 개강이라는 것.
"당장 새 학기부터 강의해야 한대요.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죠.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제가 2순위였답니다. 1순위가 ○○○셨는데 문제가 생겨 못 오시는 바람에 제가 된 거고 합격 통보가 늦어진 거죠."
그래서 미국 비자만료 전날 부랴부랴 하와이서 짐을 싸서 독일로 갔고 그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럽 생활을 하고 있다.
"대우는 조교수 부교수 중간 정도였고, 한국 근현대 법과 사회를 가르쳤어요. 계약기간이 6년이었어요.
한데 계약 만료는 다가오는데 학교에서 연장을 한다 만다 하는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갑갑했죠. 그때 마침 베니스에 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온 거죠."
이태리로 넘어가기 전 잠깐.
그라고 국내서 자리를 잡고싶지 않았을까?
"하와이 가서도 지원했죠. 2013년 겨울까지 서른 번 정도 면접을 본 것 같아요. 자포자기 상태였죠. 저라고 왜 국내 자리 욕심이 없었겠어요? 운도 지독히도 안 따라주더만요."
다 포기하고 그 자신 표현을 빌린다면 "백의종군하겠다" 해서 강사 자리나 알아보는데 독일서 공고가 나서 유럽생활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독일 쪽에서는 한국과 미국서 교육받은 경험을 높이친 것 같다 한다.
그가 베네치아로 적을 옮기기는 6년 튀빙겐 계약 기간이 끝나기 직전인 2019년 10월 말이었다.
"비공식 제안이 학교에서 있었죠. 동양학부, 특히 한국학과를 키워야겠는데 지지부진했죠. 그래서 마땅한 사람을 물색하다 저를 생각한 것 같아요. 제가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나와있지 하니 쉽게 도망은 안 간다 생각했겠죠."
보통 이런 자리 채워 놓으면 얼마 안 있어 버티지 못하고 가버리는 일이 많다.
그렇담 그는 이곳에서 야망이 없을까? 꿈은 많다. 다만 이곳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암투가 극심하고 넋 빠지는 일도 많아 녹록치는 않다.
애써 펀드 확보해 자리 만들어놨더니 엉뚱한 사람을 꽂아버리는가 하면 심지어 동료한테 소송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당분간은 수업에만 충실하자 생각한다"고 한다.
학교 혹은 학과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우리 학교는 중산층 자녀가 많이 와요. 8개 단과대학 중 동양학부 교수진이 80명이 넘습니다."
그 동양학부에 앞서 말한 한중일 말고도 베트남 페르시아 인도 학과 등이 있다 한다.
한국 인기는 어떨까?
"많아요. 물론 k팝 k드라마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죠. 그게 큰 영향을 줄 텐데 막상 이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드라마 대중가요 때문이라 하면 좀 싫어해요."
아무래도 이른바 딴따라로만 치부되는 일을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부임하던 무렵에는 한국학 전임교원이 한국고전문학 전공 이태리 여성 교수 한 명인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부임하던 무렵 한국어 교육 담당 두 교수도 채용되어 현재 전담교수는 넷이 있다 한다.
어느 정도 학과로서의 골격은 갖춘 셈이다.
2022년 가을학기에는 대학원 과정까지 만들어 20명이 들어온다.
이태리 쪽에서 이 학교 동양학 위상은 어떨까?
뻥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교수는 "이태리 넘버원"이라 주장한다.
"한국학 천공과정 2010년 7명으로 시작했답니다. 지금은 안정화 단계에 들었다고 할 수 있죠.
우리 학생들 얘기 들어보면 한국어가 너무 아름답다고 하는 친구가 많아요. 이상하죠."
참 파도바 얘기하는 김에 방송인으로 널리 알려진 알베르토가 베네치아 출신이고 한 번 인근 이곳 파도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일도 있다 한다.
"학생들은 주로 중산층 있는 친구들이죠. 북부 출신이 칠십프로죠. 그래서 아무래도 학생들이 여유가 있는 편이죠."
이태리 동양학 사정도 탐문해 봤다.
"남부 나폴리대학에 동양학부가 있고 로마엔 사피엔자 대학에도 있어요. (한국학) 석박사가 있는 데가 우리까지 세 군데죠.
시에나대학이 중요한데 시에나가 교육도시에요. 거기에 한국외대 이태리어과를 나오시고 이태리 와서
학부를 다시 하고 석박사를 하신 정임숙 선생이 교편을 잡고 계시는데 열심히 하십니다.
그 외에 볼로냐대학도 있고 토리노대학이 한국학 전담 교수를 국제교류재단 지원으로 뽑았어요."
한국학 착근을 위한 그의 복안은 무엇일까?
"우리는 학문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봐요. 이른바 한국학 제도적 뿌리내리기죠. 이걸 해야 한다고 봐요.
이를 위해 유럽 쪽에서 펀딩을 받아서 한국학연구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한류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그것이 필요한 것도 인정은 합니다만, 그것도 보다 넓은 한국학 착근이라는 안목에서 접근했으면 싶어요."
조금은 추상적이라 구체적인 생각 혹은 복안을 물어봤다.
"이쪽 EU에 ERC라 해서 유리피언 리서치 카운슬이라는 데가 있어요. 펀딩 규모가 큰 편인데 이쪽을 뚫어볼 생각입니다. 그 자금을 확보하면 안정적인 한국학 기반을 마련하게 되겠죠.
한국 쪽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을 받기도 했어요. 팔천 만원 받아 학술대회도 하고 했죠.
저는 아무래도 제가 공부한 분야도 있고 해서 한국 근현대사 자체를 유럽 혹은 이태리와 접목해야 한다고 봐요.
특히 한국 관련 국제법 이슈는 중요합니다. 이태리가 한국전졍 때 의료진만 파견합니다.
여긴 공산당 영향이 커서 그것이 1957년 불법화한 독일[서독]과는 사정이 다르죠. 모스크바 바깥에서 공산당 영향이 제일 큰 데가 이태리라고 하죠. 그러니 파병 문제를 두고 논란이 심했겠어요?결국 논란 끝에 의료진을 파견한 거죠.
이처럼 한국은 알게 모르게 이태리에도 짙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문화재 관련 제네바협정이 만들어지잖아요?
뿐인가요? 헤이그협약은 러일전쟁 유산입니다. 그 러일전쟁이 한국을 영향권에 두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이었잖습니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봐야 하겠죠. 이렇게 보면 한국과 유럽, 한국과 이태리 이야기를 할 게 많아지죠."
그는 특히 국제법 관련 한국 이슈들을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이는 아무래도 하와이 국제법 유학 영향이 큰 듯하다.
물론 20세기 한국이 이룬 성취들도 연구에서 빠질 수는 없다.
"결국 거기(한국) 산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가 중요하면 그것을 소개해야지 않겠어요?"
이런 역사국제법에 기초한 연구와 더불어 두번째로 종합아트 히스토리를 구축하는 일을 하고 싶다 한다. 이는 아무래도 그가 몸담은 베네치아 특수성과 연동할 것이다.
"미술이나 건축, 영화 이야기를 안할 수 없죠. 베네치아 영화제,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를 뺄 수는 없잖아요.
피렌체서 한국영화제를 매년 하는데 반응이 좋다 해요."
그 말을 듣고선 왜 베네치아 한국영화제를 만들어 보지 그려냐고 되물으면 껄껄 웃기도 했다.
한류 현상 혹은 한류 자체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한 원천으로서의 아트 히스토리 구축 토대를 마련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혔다.
한국에서는 교환학생이 매년 많이 온다 한다.
"제가 여기 있으면서 저와 같은 토대를 구축하고 나중에는 그것이 자체로 굴러갈 수 있다면 제 역할은 어느 정도 한 거라고 봐야죠. 그게 제가 할 일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