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오트밀을 즐긴 이완용, 술은 마시지 않았다
<천고의 역적은 무얼 먹고 살았나>
이완용(1858~1926)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를 보면 <언행잡록言行雜錄>이라 해서 그가 평소 했던 말과 행동 등을 정리한 항목이 있다.
이를 읽어보다가 그의 식성 이야기가 나오기에 재미있어서 옮겨본다(옛날 일본어가 되서 제대로 해석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한자는 그래도 한 자 이상 읽을 수 있으니 이를 토대로 때려맞추어보고자 한다.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대강의 뜻만 새기려고 하는 것이므로 여러 선생님께 양해 부탁드린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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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먹었는데, 우선 오전 8시 무렵(유사시에는 제한을 두지 않음)에는 중국 차, 홍차 또는 가피차枷皮茶(커피?) 같은 것, 우유, 서양 보리죽(오트밀), 달걀, 생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과일 종류 등을 2~3개씩 번갈아가며 먹었다.
오전 12시에는 조선요리를 먹었는데, 밥은 늘 단순하게 백미로만 지었다.
각종 반찬은 육고기보다는 물고기를 가장 좋아했으며, 채소는 집에서 기른 것보다 산에서 기른 것을 좋아했고, 반찬 그릇은 2~3가지를 넘지 않을 정도로 '검약했다.'
어떤 것이든 3~4번 이상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봄과 여름에는 오후 4~5시쯤 다과를 들였는데 내키는 대로 조금 먹었으며,
7시에 저녁을 올렸는데 반찬은 단순하지만 정갈한 데 힘쓰고 풍성하게 차리지 못하게 했다.
술은 조선 술은 겨우 한 잔을 넘지 않았고, 서양 술도 한 '고뿌'면 족했으니 주량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요리보다는 서양요리를 더 좋아했는데, 중국요리를 먹는 것은 내(필자 주: 이완용의 외조카 김명수)가 보지 못하였고 일본요리는 때때로 연회 자리에서만 맛보는 걸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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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침은 무슨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은 느낌인데,
이완용이 육영공원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했고 미국 공사관 참찬관으로 오래 근무해 서양 문화에 밝았음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때 조선에 차茶도 꽤 들어왔던 모양인데, '가피차'라고 한 건 아무래도 커피 같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1915년인가, 순종이 이완용에게 '가배 기구 1조'를 하사했음을 상기하자.
과연 그는 어떤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셨을지 궁금하다.
백미밥에 생선을 즐겼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과연 어떤 생선이었는까지는 적어놓지 않았지만, 옛 서울 사람들이 즐겼다는 비웃이(청어)나 웅어, 전어 같은 게 아니었을까?
산종山種 채소를 좋아했다니 하녀들이 옥인동 19번지 바로 옆 인왕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산나물을 뜯었거나 아예 그가 소유한 산전山田이 있었겠지 싶다.
삼시세끼 먹는 시간이 지금 우리네와 그리 차이나지 않는다.
옛 말에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는데(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이를 증명하는 건 아니겠지만 술 한 잔도 겨우 마셨다니 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사진을 보면 제법 호리호리하다.
정현웅(1910-1976)이라고 근대의 이름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워낙 일본 요리를 좋아해서 "입맛은 친일파야"라고 뇌까리곤 했다는데(과연 입맛만 친일파였을지는 논외로 하고), 이완용은 입맛이 친미파였던지 서양요리를 즐겼다고 했다.
일본요리는 연회에서나 먹었다니 집에선 먹지 않았단 뜻이렸다.
1920년대엔 경성 한복판에 중국요릿집이 적잖이 있어서 직접 가서 주문하거나 심지어 배달도 가능했다는데,
이완용 후작의 입맛엔 영 별로였던가 보다.
이 전기의 저자 김명수는 이완용이 평소 '검약'했다는 걸 강조하고자 이런 사생활을 집어넣었으리라.
하지만 그 시기 저렇게 백미밥에 고기와 생선을 삼시세끼 먹을 수 있는 이가 과연 조선에 몇이나 되었을까.
하물며 커피나 오트밀 같은 건?
**** Editor's Note ***
그가 시대를 앞선 개화파였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이 앞서간 선각 의식이 조선 경멸론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윤치호가 대표적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이완용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