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 MISCELLANIES

몹시도 고약한 삶, 쪽팔리지만은 말아야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3. 2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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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마 궤적에서 비롯하는 차이일 듯 한데 통섭지향을 선언한 외우 신동훈 교수께서는 논문 쓰기에서 결국 희열을 느낀다 했지만 나는 정반대다.

내가 논문 혹은 그에 준하는 글로 이곳저곳 싸지른 글이 사오십편은 될 듯한데 난 논문에서 단 한 번도 오르가즘을 맛 본 적 없다.

그렇다고 뭐 억지로 꾸역꾸역 썼느냐 하면 것도 아니어서 기사건 논문이건 내가 쓰고 싶은 글만큼은 워즈워스가 말한대로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로 걸신걸린 듯 썼다.

하지만 내가 기사나 혹은 논설을 써서 맛보는 그 희열은 논문에선 없었다.

주변에서 나를 두고 기자가 아니라 연구자 길을 갔어야 한다는 분이 많다. 한둘이 아니라 실은 엄청 많다.

왜 그럴까 상상해 보면 조금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나는 지금처럼 내가 좋아 내 멋대로 하는 상상 연구가 좋지 조직에 얽매인 그런 연구자의 길은 증오한다.

그래서 나는 선생은 될 수 없다.

이른바 자유영혼 지꼴림식 재야학도라 할 수 있는데 난 이것이 내가 지닌 장점이라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 아주 가끔 나는 머리가 비상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천재라는 뜻이 아니라 발상 자체가 내가 생각해도 기발하고 비상하기 짝이 없다.

물론 그렇기에 비약이 많이 따르고 남들보다 실수 오판하는 일이 많기도 하지만 나 같은 놈 서너놈만 있어도 한국인문학은 흐름이 달라졌으리라 가끔 생각하곤 한다.

이 자유로움이 가능한 오직 하나의 이유가 있으니 그것이 나는 스승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난 선생이 없다. 이 말이 독불장군 유아독존으로 비쳐도 할 말은 없지마는 여타 연구자와 같은 길을 갔다면 지금과 같은 자유발상인 김태식이 가능이나 했겠는가?

스승 제도는 자율과 상상을 죽인다.

내가 전업적 연구자 길을 갔다면 나 역시 저 덜떨어진 인간들처럼 선행연구 찾고 서론 본론 결론하는 틀에 맞추어 그걸 논문이랍시고 던지고 있을 것이다.

그에서 지금과 같은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이나 했겠는가?

이런 나도 고민이 없지는 아니해서 이제 진짜로 환갑이 코앞인데 언제까지 이런 전투적 삶을 살아야할지 그것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다.

근자 국립박물관 문제를 호되게 씹었고 그 고삐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래저래 안면치는 사람들 왜 신경쓰이지 않겠으며 지르는 내가 쾌재를 부르겠는가?

다 불편하다. 아니 고약할 정도로 불편하다 말해둔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하며 나이 들수록 누가 맞고 누가 틀리며 저것이 옳고 이것이 그르다가 아니라 포용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 옳다.

그에 견주어 나는 전연 딴 길을 가고 있으니 이처럼 고약한 길이 있겠는가?

근자 누군가 날더러 기자님이 칭찬하는 사람은 한 분밖에 없어요 하는데 돌아보니 썩 틀린 말은 아닌 듯해서 몹시도 찝찝하다.

그래서 각중에 방향 바꾸어 너도 잘한다로 돌아서?

이 역시 체질에 맞지 않는다.

당분간, 아마 죽을 때까지 그리 되지 않을까 싶지마는 이 길을 죽 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 한다.

그래도 하나 다행이랄까?

심사가 뒤틀렸다는 말은 별로 듣지 않으니 말이다. 

결론은?

나 스스로 나한테 쪽팔리지 말자.

딱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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