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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서일기] (3) 쇠죽 끓이다 만난 게티즈버그, 그리고 로드 바이런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3. 3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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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에서의 링컨

 
지금은 판도가 거의 바뀌어 성문영어 혹은 성문종합영어라고 하면 지금 입시계 영어 교보재로는 아마 주도권을 내주었으리라 보지만

내 세대야 말할 것도 없이 국어에서는 한샘, 수학에서는 정석, 영어에서는 성문이었다. 

내가 현장 사정을 모르긴 하나, 저 중에서도 정석만큼은 여전히 독재 체제를 구축 중이 아닌가 하는 모습을 가끔씩 들르는 대형서점 코너에서 확인하는데,

한샘은 어떤지 모르겠고, 성문은 아마 자최를 감추다시피 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 세대는 조기영어교육? 이딴 거 없다.

거기다 나는 시골 깡촌 산촌 출신이니 진짜로 중학교 입학하면서 영어 알파벳을 처음 접했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써먹을 수 없는 예문 I am a boy you are a girl, 혹은 Bill is sitting in his bedroom 하는 예문을 통해 처음으로 영어라는 세계를 접했다. 

내가 사는 금릉군 대덕면에는 성문 영어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성문이라는 존재를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 성문 제국도 3학년 때인가? 맨투맨이라는 새로운 영어 교재가 강자로 느닷없이 부상하면서 독재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 영어교재는 전국이 같았다.

다 같은 교재로 썼으니, 그에 맞는 전과 하나만 있을 때였다.

다른 영어 교재? 혹은 교보재? 우리 동네에는 없었다.

그냥 전과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공부에 취미 혹은 탄력이 붙기는 했지만, 책이 있어야지? 

그때 마침 동네 형 방구석에 영어 문법책 하나가 딜링딜링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이때가 내 기억에 분명히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보니 너덜너덜 꺼풀데기는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본문 편집은 아주 칼라풀하게 좋았다. 

그걸 집으로 가져와서 각잡고 제대로 독파하기 시작했다.

분량이 상당했다고 기억하며, 훗날 접하게 된 성문영어와 비교할 때 그 초보 성문영어보다는 두꺼운 편에 속했다. 

뭐 그때 영어 문법이야 천편일률이었으니 5형식이 어떻고 to 부정사가 뭐니 관계대명사가 뭐니 하는 그런 천편일률하는 챕터 구성이었다. 

나는 이 교보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날마다 끼고 살았으니, 소 먹이러 갈 때도 들고 다녔고, 쇠죽 끓이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이 책을 놓지 않았다. 

뭐가 좋았는가?

그때 비로소 나는 영문학을 접했기 때문이다.

다른 영문법 교재가 그렇듯이 이 교재 역시 비록 길지는 아니하나 적절한 예문들을 끌어다 대어 그것을 번역하고 풀이하고 구문론을 설명했지만,

그 예문들이 지금 생각하면 하나하나 주옥이었다. 

셰익스피어야 너무나 자주 짧은 구절로 등장했고, 이 교보재에서 나는 처음으로 에이브러험 링컨의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원문으로 처음 접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이리 시작하는 저 짧은 연설, 그건 신세계였다.

내가 저때 영어 무얼 알았겠느냐만 훗날 스타카토라고 배우게 되는 그 운율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느낌? 입안에 착착 감기는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저 짧은 문장이 너무 좋다 분량도 얼마 되지 않으니, 통째로 외우며 소 먹이러 다닐 때 저걸 반복하고 외치곤 했다. 
 

 
물론 발음은 개판이었다. 이 발음은 훗날 내가 카투사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빠다 바른 비슷한 걸로 교정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도 나중에 혹 기회 닿으면 해 볼까 한다. 

비단 게티즈버그 연설만이 아니라 그 교재가 이곳저곳에서 끌어다댄 예문들은 하나하나가 다 주옥이었고, 무엇보다 그 예문마다 출전을 밝혔으니,

이를 통해 나는 먼훗날 이런 작품들은 모름지기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겠다 하는 그런 심사를 틀게 되었다. 

to 부정사 얘기가 나온 김에 결과를 말하기도 한다는 그 예문으로 항용 드는 문장이 

I a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 이라는 저명한 영국 낭만파 시인 Lord George Gordon Byron의 시 귀절 하나라,

물론 이것도 판본다마 여러 버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게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저 to 부정사 용법이 중요한 시절이라 

나는 저에서 바이런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고, 훗날 내가 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진짜 바이런다운 바이런을 접하게 되었으니,

역시 어릴 적 무심코 마주한 문장 하나가 그만큼 소중한 자산 아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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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이십년 온축을 한달에 쑤셔박았다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4%B7-620

 

남들 이십년 온축을 한달에 쑤셔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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