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만에 다시 찾은 이소노카미 신궁

석상신궁石上神宮, 이소노카미 진쿠는 일본국 나라현奈良縣 천리시天理市에 소재하는 신도神道 신사神社라
한국에는 칠지도七支刀[七枝刀라 쓰기도 한다]라 해서 백제왕이 할 일이 없었는지, 아니면 대장장이 자랑을 하고 싶어서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암튼 열라 잘 만들어서 왜왕한테 선물로 만들어줬다는[이것도 하사인지 헌상인지 증정인지 논란이 극심하다] 쇠칼을 봉안한 데라 해서 잘 알려져 있다.
오늘은 어쩌다 이 신궁을 다시 찾았다.
신사 치고는 역사 유래가 가장 깊은 곳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연원에 견준 사세社勢가 대단한 느낌은 주지 않아 아담하다.
신사가 있는 마을을 포류정布留町이라 하고 후루초ふるちょう라 읽거니와, 그 진산이 포류산布留山이다.
지금 찾아 보니 해발 266미터라 하니 코딱지라, 우리네 서울 남산 정도 된다 생각하면 되겠다.
이 작은산 서쪽 기슭에 정좌하는 산사라 풍광은 아주 좋다.
요새야 이 일대는 전체가 오로지 천리교天理敎라는 특정 종단 도시 혹은 마을이라, 신궁 자체도 그 교단에 포위된 듯한 느낌도 준다.
그만큼 이곳은 이 종단을 빼놓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남대문 들어서면 배례拜禮하는 배전拜殿이 있고 그 뒤로 불교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주전主殿 혹은 본전本殿이 있지만 주전은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 일대를 금족지禁足地라 한대나 어쩐대나, 암것도 아닌 땅도 금족 이런 말만 붙이면 뭔가 있어 보이는데, 이곳 금족지 역시 그렇지 아니하다 결코 단언할 수는 없다.
칠지도는 저 배전 뒷마당, 그러니깐 대웅전 마당 땅속에서 에도시대 말기인가 출토한 것으로 기억하거니와
그 출토지는 담장에 막혀 구경도 쉽지 않고 이렇다 할 출토지점 표식도 없는 곳으로 안다.
매납물이라 함은 훗날 어떤 사연에 피난용으로 묻은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신을 위한 봉헌물일 테고 다른 껴묻거리도 함께 묻었겠지만 발견 당시가 고고학의 시대가 아니니 칼만 꺼내고 말았을 것이다.
[하도 기억이 오래라서 같이 나온 유물도 있지 않나 하는 희미한 기억 편린도 있는 듯하다.]
혹 훗날 이 일대를 발굴한다면 매장 구덩이와 다른 매장물도 완연히 출현하리라 본다.
검劍과 경鏡과 인印은 도교 삼종신기三種神器라 훗날 시간이 흐르면서 저 印, 곧 도장 인장 자리를 제끼고 玉이 그 자리를 꿰차거니와 신도神道를 일본 고유 종교라 하나 개소리라 실은 도교다.
훗날 신흥 종교 불교와 쟁패한 그 신도가 도교다.
불교를 앞세운 소가씨에 맞장 뜨다 일망타진된 모노노베 물부씨物部氏를 일본적 전통 신앙 신도파라 주장하나 웃기는 소리.
그 신도란 것도 불교보다 먼저 상륙한 도교 일파에 지나지 아니하고
저때 잠깐 졌지 이내 세력을 회복해 이후 일본 종교사상계를 양분하게 된다.
훗날에는 아주 섞여 구분도 되지 않았지만 메이지시대 요망한 원리주의자들이 나타나 권력에 야합해 폐불과 그에 따른 신불 분리에 따라 다른 것처럼 포장됐을 뿐이다.
이 요망한 흐름 끝자락에 위치하는 권력의 주구 어용 역사학도가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쓰다 소키치였다.
엄밀한 고증주의 역사학도?
웃기는 소리 작작들 하시라.
이 어용사학도는 생평하는 역사학 사명을 잡것을 솎아내는 방식으로서의 순수성 회복이었으니
그에게 참된 것은 야마토혼이었고 신도는 그 구현이었으며
기타 불교 유교는 그 순수성을 오염케 한 잡것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 도교가 일본적 혹은 왜적倭的 색채를 가미하니 유별난 사상 종교처럼 보이지만
일본 신도는 철두철미 도교요 천황天皇 역시 그네가 숭상하는 만신전의 우두머리 북극신 천황대제天皇大帝다.
왜 칼인가?
신체神體 자체이면서 천상의 신이 지상으로 강림하고 또 지상의 그가 천상으로 복귀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인박산에서 수도하며 내가 기필코 삼한을 일통하고 말겠노나라는 김유신의 맹세에 하늘이 그가 든 칼끝을 움직이며 반응을 보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주의 기운, 그 막강 위대한 힘이 찌릿찌릿 타고서 강림해 온 땅을 진동케 하는 통로, 그 전원이 바로 칼이었던 것이다.
동경과 도장 또한 근간이 같다.

각설하고 그 담장 틈바구니를 들여다 보면 저런 틈새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곳을 처음 온 때가 2001년인가이니 물경 24년이 흘렀다.
2002 한일월드컵 공동개최에 즈음한 한일 국보전 교류 개최에 맞추어 중박에서인가 기획한 답사였으니 그때 기억이 희미하지만 큰 변모는 보이지 않는다.



여느 우리네 산사처럼 아늑하고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참 좋은 절이다.
그땐 돌아보지 못한 뒤안을 둘러보니 둘레길 안내판이 보인다.
나라 홍인사인가 하는 절까지 6.2킬로미터라니 보나마나 옛날 이곳과 나라를 오가는 길이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걸어봤음 싶다.


절 입구 한 켠엔 닭장이 있어 아마도 인근 연못에 사는 천연기념물 잉어 먹이 고물을 얻어먹고 살 사는지 피둥키둥 닭들이 대체로 건강상태 양호한 편이지만
이쪽 계류계도 노인화가 심각해 대체로 보니 늙다리 계열이라 백숙으로는 적당치는 아니한 느낌을 준다.
혹 모르겠다. 가마솥에 엄나무 잘라 넣어 하루 종일 장작불 때면 흐물흐물해질지.


인근 코딱지 만한 연못에 사는 잉어들은 그 자체 무슨 ouv가 있는지 일본국 천연기념물이라는데
200엔짜리 먹이용 빵 한 봉다리 사서 던져주는데 잉어가 동작이 그리 느려텨진 생선인지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던져주는 먹이도 제대로 한 방에 낚아채는 놈들 양태 보니 잉어 요양원 아닌가 싶었다.
하긴 생물로 천연기념물 친구 치고 수백 살 먹지 않은 친구 있던가?


인간계나 계계鷄界나 어계魚界나 고령화 문제 보통이 아닌 단계 아니겠는가?
세대교체 심각하다.
참고로 이곳 칠지도는 오늘 현재 나라국립박물관 초국보超國寶 전에 출품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