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THESIS

금동관 세움장식이 3단인지 4단인지가 중요해? 시민을 위한 고고학을 제창하며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0. 31. 13:40
반응형
[경산시보도자료]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발굴현장 공개-게시.hwp
9.64MB

 



 
아무래도 몸이 천리 먼길 떨어져 있으니, 고국 소식에는 무던해질 수밖에 없거니와

근자 경북 경산 쪽에서 주목할 만한 발굴이 있다 해서 그쪽이 보도자료를 냈으니,

경산시 보도자료 원문이 첨부파일이라,

조사단에는 이보다 더 낳은 자문회의 자료 같은 것이 있을 테지만

그리스 어느 섬에서 그런 자료까지 해당 기관에 요청해 받기는 그래서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나름 짜맞춰 본 것이 이것이라는데

 
이 보도자료를 잘 보면, 경산시나 이를 발굴한 쪽에서도 나름 의미가 있다 생각한 흔적이 역력하니,

무엇보다 관련 첨부 사진 양과 질을 보면 안다. 비교적 많이 첨부해 놨다.

그만큼 우리 이런 것 팠다 이렇게 선전하고 싶은 욕망이 분출했다고 본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씩 말을 보태어 발굴성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위선 이번에 파제낀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이라는 데가 문제가 되는데,

이를 경산 지역사회에서는 신라와 쟁투하다 결국은 패배하고서는 그 일원으로 편입한 압독국이 있던 데라는 점을 착목해,

아연 압독이라는 실체를 부각하는데 노력하지만

물론 그 지역색이 신라에 편입되었다 해서 어디가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저 고분군은 완연한 신라 무덤이지만, 아무튼 지역사회에서는 압독국을 계승한 그것으로 본다. 

위선 이번 발굴성과를 하나씩 정리하자면

2024년 국가유산 보수정비사업 일환으로 국가유산청 돈을 받아서 이미 사적으로 지적된 임당동 고분군 보존 방안 마련을 위해 무덤 뚜껑돌이 노출된 무덤 하나를 파서 그 자료를 확보키로 하고(늘 말하듯이 보존을 이유로 파야 하는 이유를 나는 납득 안하고 못한다) 
 

이동이 있었나? 비름박 귀퉁이다.

 
그 관리 주체인 경산시가 직접 팔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딘가와는 자격증이 있는 기관이랑 협업해야 하니,

제안서 평가인지 공개입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리해서 조사단은 경북문화재단 문화유산원(원장 박재영)을 2024년 4월에 선정하고서는

돼지머리 올리고서 마침내 파기 위한 본격 작업을 돌입한 모양이라 

조사 대상 무덤 정확한 지번은 경산 임당동 676-2번지 일원이라 한다.

파서 본 결과 이 무덤은 돌로 관을 안치하는 방인 현실玄室, 곧 무덤방을 넙데데한 돌덩이인 판석과 진흙으로 봉토를 이른바 석실분石室墳으로 드러났다 하거니와,

이런 무덤은 석실분이 아니라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불러야 한다.

석실분이라면 바위를 뚫고 들어가 만든 무덤이라는 뜻밖에 더 되겠는가?

뭐 한국고고학이 내장한 용어 문제가 한둘이겠냐마는 이 문제는 잠시 덮어둔다. 

이 무덤은 파손 상태가 심하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도굴 때를 안 타거나 덜 탄 듯, 내부가 비교적 그런대로 온전히 남았음이 확인됐다.
 

관 받침 시설을 한쪽 벽면에 몰아넣기 했다.

 
이럴 때 우리는 이리 외친다.

땡 잡았다!

이 대목을 조사단은 "지금까지 고분군 내 조사된 석실분 중 구조와 형태가 가장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라고 한다.

고분군群이라 했으니 비슷한 시기에 만든 무덤이 떼로 밀집한 공동묘지라는 뜻이다.

이곳 공동묘지만 해도 무수히 과거에 파제꼈다.

그것들 다 어디로 갔는지, 다 파내고 잔디 입히고 봉토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빈깡통이다.

그걸 보고서 무얼 느껴야 한다? 그건 폭력이다.

그렇다고 뭐 박물관이라도 제대로 되어 있냐 하면, 전부 대학박물관이나 국가박물관에서 가져가 버렸으니

그나마 경산은 근자 시립박물관도 생기고, 저를 위한 전문 박물관도 조만간 문을 연다 하니 사정이 나은 편이기는 하다만,

고고학도들이 간여해서 제대로 만드는 박물관 내가 보들 못했다.

박물관과 고고학은 다르다. 

또 객설이 길어진다.

암튼 파서 드러내니 이 무덤은 아직 제대로 된 분류 명칭도 부여되지 않은 듯, 임시로 노출고분이라 한다는데,

암튼 무덤방은 자로 재 보니(요샌 어플로 측량하긴 할 텐데) 길이 330cm, 너비 245cm로 공중 부양에서 내려다 보면 넙데데 장방형(직가각형이라는 뜻이다. 좀 더 쉬운 말 놔두고 왜 이런 말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형태이며,

비름빡은 물론 돌로 쌓았지만, 그 틈새는 회칠, 곧 시멘트 칠을 했단다.

서양 같으면 회칠하고서는 그 위에다가 그림도 그리곤 하지만, 우리네 조상들은 이런 귀찮은 일 안했다.

이럴 때 좀 해 주면 얼마나 좋아? 
 

음 이제 감이 잡히는데, 문제는 보도자료 기술과 언뜻 상반한다. 제일 구석데기 뒤쪽 벽면에다 시체를 밀어놨다. 이것이 바로 주인은 앞쪽 대문을 기준으로 제일 뒤쪽 가장 후미진 곳 중앙을 차지한다는 그 그랜드디자인이다. 무덤 주축은 이 시대면 남북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한데, 모르겠다. 이 시대는 동쪽이 대문일 수도 있다.

 
무덤방 벽은 높이가 약 2m로 안쪽으로 기울여 천정을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하니, 보나마나 뚜껑은 다 날아갔다는 뜻이다.

외부에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으니,

이를 고고학에서는 연도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무덤방 왼쪽에 치우친 지점에 만들었다 하는데, 왼편?

도대체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오른편 왼편이란 말인가?

무덤방 앞쪽에서 바라봐서 왼편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무덤방 주인이 무덤길을 바라보고 선 왼편이란 말인가?

첨부 사진을 보면 놀랍게도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이다! 조사단이 완전히 오판했다.

오른쪽 왼쪽을 구분하는 기준을 몰랐다. 무덤 방향은 철저히 묻힌 사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이럴 때는 왼편 오른편이 아니라, 동쪽인가 서쪽인가 하는 식으로 표식해줘야 한다. 

모든 동아시아 관점에서는 무덤은 항상 무덤방에 들어앉은 사람이 남쪽 태양을 바라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왼편이라 함은 이 사람 왼편이라는 뜻이다. 

무덤방을 우람하게 덮어 봉긋하게 쌓아 올린 지점을 봉분封墳이라 하는데, 封은 흙을 쌓아 돋우는 일이요, 墳은 흙토가 부수자로 들어가 있는 데서 엿보듯이 무덤 중에서도 본래는 흙을 돋우어 올린 그런 무덤을 말한다. 

이 이름 없는 무덤은 봉분 기준으로 직경(이 말도 제발 쓰지 마라, 왜 지름이라는 말 놔두고 이딴 거지 같은 말을 쓴단 말인가) 15m 정도라는데, 어랏? 코딱지 만하네? 

돌로 쌓아 만든 방에다가 시체는 그냥 덩그러니 놓지 않았다.

사람이 자는 자리는 침대도 놓고 이부자리도 깔고 다른 이불로 덮듯이, 시체 또한 이렇게 하는데

무엇보다 시체는 관棺이라 해서 별도 작은 집을 지어 모시기 마련이다.

관은 그 재료에 따라 다양한데, 우리는 나무널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관도 지위와 신분, 권력, 돈에 따라 더 치장하기도 하는데,

널도 하나로 부족하다 해서 몇 겹을 입히기도 하니, 그렇게 덧대어 입힌 널을 덧널이라 한다.

한자로는 단겹을 관棺이라 하고, 덧겹을 곽槨이라 하니, 차이? 없다. 다 널이지 무슨 개뼉다귀이겠는가? 

이 관은 무덤방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놓지는 않았다.

사람이 잘 때 이부자리를 깔듯이 무덤에서도 똑같아서 이 관을 놓는 이부자리를 현재 한국고고학에서는 관대棺臺라든가, 시상대屍床臺 같은 왜놈 찌꺼기 말을 쓰기도 한다.

그냥 관받침대 혹은 널받침시설이라 하면 된다. 

이 관받침대가 확실한 보도자료 기술은 없지마는 아마 무덤방에서는 하나가 확인된 듯하고, 그것도 중앙이 아니라 한쪽 편에 치우쳐서 설치된 듯하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무덤길로 통하는 통로가 무덤방과 만나는 그 왼편(어딘지 모르겠지만 암튼)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됐다 한다.

(이리 계속 쓰고 보니 진짜로 보도자료 잘 쓰야 한다! 앞 글을 다 쓰고 관련 사진을 검토하다 보니, 내가 잘못 이해했다. 보도자료 작성과 관련해 증거로 남긴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이 무덤은 훗날 다른 사람을 추가로 묻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

뭐 사람 살다 보면 계획대로 되는 게 얼마나 되던가? 쫑 났을 것이다. (이 또한 바로 앞문장 괄호안 기술과 같다.) 

목관이야 당연히 다 썩어 문드러졌을 테고, 그렇게 되니 관 안에 들어 있었을 것들과 그 밖과 목관 위에 놓였을지도 모르는 껴묻거리랑 하는 것들이 짖이긴 상태로 발견됐다 하는데 

이 관받침대를 중심으로 해서 그 사방에 금동관을 필두로 금동제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등 "무덤 피장자被葬者의 위세를 보여주는 착장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피장자 저딴 거지 같은 말도 추방해야 한다. 무덤 주인이라 하면 된다. 

조사단과 경산시는 이 금동관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으므로 저 구절만 누끼 뜬다. 

 
특히 금동관은 2개의 엇가지 세움장식과 3개의 맞가지 세움장식 및 관테로 구성되어 있는데, 맞가지 세움장식이 4단인 것이 특징이다.

1982년부터 진행된 다수의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발굴조사로 그동안 유적에서 금동관이 10개체 이상 출토되었지만

모두 3단의 맞가지 세움장식을 가진 금동관으로 4단 맞가지 세움장식 금동관은 이번이 처음 출토된 것이다. 


이번에 출토된 금동관은 6세기 초 대표 금관인 국보 천마총 금관, 보물 경주 금령총 금관과 형태적으로 비교할다 수 있으며,

금동관 중에서는 전傳 경북 출토 금동관(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을 제외하고 유적에서 출토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발굴성과 핵심이라 할 만한 대목인데, 이 보도자료를 시민이나 그 재원을 주신 국민을 위한 발신이 전연 아니다.

동료 고고학도를 보라는 시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린 이런 거 팠다. 니들은? 이 시위에 다름 아니다.

저 구절 어디에 국민을, 시민을 위한 발신이 있단 말인가? 

금동관 세움장식이 3단인지 4단인지는 눈꼽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금동관이 나왔다는 것이며, 그 금동관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이것이 시민을 위한 국민을 위한 발신이다.

4단이 처음으로 나와?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

천마총 금관이랑 맥락이 비슷? 그래서? 둘은 사촌쯤 된단 거야 뭐야? 

이딴 거지 같은 고고학 필요없다.

국민을 위한, 시민을 위한 고고학이 필요할 뿐이다.

4단 세움장식 나왔다 해서 그걸로 돈 벌지 못한다. 천마총 금관과 비슷해? 그래서 어쩌라고? 
 

금귀걸이

 
이어지는 보도자료 구절. 
 
또한 함께 출토된 가는고리 귀걸이의 금제 장식 역시 출토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 자료로 삼국시대 경산지역 장신구의 독자성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는 만큼 압독국의 고분 문화연구와 지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와 경산을 유리케 하려는 그 욕심을 누가 뭐라하겠는가?

다만 명백한 신라무덤을 압독국 유산으로 치환하고자 하는 그 욕망은 역사를 오도 인멸한다. 

유사역사학? 그만들 웃기세요.

지들은 유사역사학하면서 누구더러 유사역사학이래?

***

좀 심하게 써서 경산시랑 조사단에 미안하단 말을 첨부한다.

미래를 위한 따끔 정도로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음 도대체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 변명해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