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후軑侯, 4개를 이은 장사국의 실력자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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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창利苍(?~기원전 186년)은 전한 열후列侯이며 장사국长沙国 승상丞相을 역임했다.
전한前漢 혜제惠帝 2년(기원전 193년) 4월, 장사국 승상이 됨으로써 대후轪侯[軑侯]로 봉해졌다.
한 고후高后 2년(기원전 186년), 사망했다.
열후列侯란 간단히 말해서 국가에서 받은 봉작, 곧 벼슬 타이틀 중 하나로서 본래는 철후徹侯라 했지만, 한 무제 유철劉徹 이름을 피한다고 해서 저리 바꾼 것이다.
리창은 여러 책에서 등장하지만 이름이 다른데 사기史記 중 혜경간후자연표惠景間侯者年表[혜제와 경제 시대 후侯에 책봉된 사람들을 연대순으로 배치한 표라는 뜻이다]에서는 "리창利仓"이라 하고,
당나라 시대에 나온 저명한 사기 주석서 중 하나로 글자 그대로는 사기의 숨은 뜻을 찾아내겠다고 포방한 사기색은史記索隐에서는 "대후 주창창轵侯朱仓"이라 했으며,
통지通志에서는 "미창米苍"이라 했으며, 사기와 언제나 병렬되는 한서漢書는 고혜고후문공신표高惠高后文功臣表[조제와 혜제, 그리고 고조의 부인 여태후 시대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 표]에서 그를 등장케 하며 "려주창黎朱苍"이라고 썼다.
그의 무덤, 곧 장사시 동쪽 교외 유양하郊浏阳河 곁 마왕퇴马王堆라는 언덕에 위치한 이른바 마왕퇴 한묘馬王堆漢墓 중에서는 두 번째로 발굴 조사되었다 해서 제2호 무덤이라고 일컫는 곳에서 나온 인장[도장]은
그가 살아 생전, 혹은 죽음 직후 가족이 쓴 진짜 이름이 보이거니와, 당연히 우리는 이를 따라 그를 '리창利苍' 또는 '리창利仓'으로 불러야 한다.
리창이 받은 봉작 대후轪侯는 그가 예리하고 장사왕을 잘 진수하고 감독하는 데 탁월한 공헌을 했다 해서 받았다.
그렇다면 왜 대轪일까?
대轪는 현재 허난성에 위치한 그의 식읍食邑이었다.
식읍이란 간단히 말해 그 땅에서 나오는 수입은 국가에 내지 말고 그 자신이 쓰라고 주는 땅과 사람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봉작 받은 땅을 써서 그 사람을 무슨 제후니 열후니 아니면 저보다 낮은 타이틀인 군君이라 부르는데
널리 알려진 조선 세조 수양대군을 보위에 앉힌 최대 공신 한명회는 상당군上黨君이라는 봉작을 받았으니 상당은 바로 청주의 별칭이다.
청주에 있는 산성 중에 가장 유명한 데가 바로 상당산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당산성은 곧 청주산성이라는 뜻이다.
리창이 식읍으로 받은 대轪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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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다만 그의 일가족 공동묘지가 있는 마왕퇴 그 무덤 일대가 그의 식읍이었거나 혹은 그것이 아니라 해도 그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당연히 자기 땅에다가 자기 무덤을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사 마왕퇴 한묘가 발굴됨으로써 일약 유명 인사, 이른바 싸이까지 상찬한 셀렙celeb이 되었으니, 이 가족 공동묘지 중 1호 무덤이라고 명명한 곳이 그의 무덤임이 드러나고,
나아가
드러난 문자자료를 통해 그가 신추辛追 혹은 [신]피避라는 사실이 밝혀졌는가 하면
죽은 시점 또한 기원전 168년을 기준으로 그 이후 대략 수년 이내임이 폭로되었다.
남편 리창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대략 20년을 더 살다 간 셈이다.
나아가 그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발견됨으로써, 죽을 때 나이를 대략 의학적으로 검증해 보니 대략 50세 안팎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대략 기원전 217년 즈음에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무덤임이 확실한 마왕퇴 1호묘马王堆一号墓에서는 “妾辛追[첩신추]” 혹은 “妾避첩피”라는 글자가 적힌 인장印章이 출토됨으로써 그의 이름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첩妾이란 후대에는 보통 정식 부인이 아닌 낮은 부인을 가리키는 명칭이지만, 남편에 대해 부인이 자신을 낮추는 겸칭이기도 했으니 이 경우가 그렇다.
곧 2호묘에 묻힌 리창에 대해 첩을 칭했다고 보아, 이 무덤을 리창의 부인 무덤으로 확정하게 된 것이다.
그의 시신이 든 관은 1972년 4월 26일 드러내고는 사흘 뒤인 그달 28일, 호남성박물관에서 개봉했다.
관 표면은 두 겹 명주실 면포丝绵袍로 덮여 있으며, 시신은 온몸에 스무 겹 면금옷绵衾衣과 명주실 삼베 직물丝麻织物이 쌌으며, 아홉 줄 리본丝带으로 묶인 상태였다.
관에는 깊이 20cm, 총량 약 80리터인 갈색 황색 액체가 있었다.
5월 1일, 시신은 관에서 꺼내어 나무 선반으로 옮겼다.
당시 미라는 병색이 돌며, 눈가에 잔주름이 가득했다.
나아가 연조직软组织은 탄력이 있었고, 관절은 움직일 수 있었으며, 혈관이 뚜렷하게 보였다.
머리카락도 아직 남아 있어 세계 고고학 역사상 전례가 없는 부패하지 않은 습시湿尸라 해서 대서특필된다. 습시란 건시乾尸에 대비하는 말로 고대 이집트나 남미 페루 지역 미라, 그리고 같은 중국 영역에 속하나 메마른 사막 건조 지역 신장위구르에서 보이는 미라가 바싹 마른 건어물 형태지만 이 분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미라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별도 챕터를 할당해 비중있게 다룰 유럽 각지 이른바 보그 바디 bog body 또한 습시에 속한다 하겠다.
이후 그를 마왕퇴 미라[马王堆尸]로 명명한다.
시신은 호남의과대학원湖南医学院 전문가들한이 해부한 후 떼어낸 장기들과 더불어 호남성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애초에는 그의 이름이 앞서 본 자료들을 근거로 신추라고 했지만 2019년에 접어들어 일부 연구자가 이름이 "피避"이며, 신추는 오독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리희利豨는 저들 부부의 아들이다. 지금의 호북성 형주荆州라는 데서 출생했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랑 함께 가족 공동묘지를 형성한 마왕퇴马王堆 한묘 중에서는 세 번째로 조사된 3호 무덤 주인공이다.
아버지 리창이 거세去世하자 아버지 봉호封号를 물려받아 제2대 대후軑侯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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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 豨[희]가 좀 재미있는데, 돼지를 의미하는 豕[시]라는 글자가 들어간 데서 짐작하듯, 저 자체로도 돼지라는 뜻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이들 이름을 개똥이 끝순이 따위로 불렀는데 일부러 천한 이름을 지음으로써 하늘의 시기를 받지 않고 장수한다 해서 그랬다는데, 저 리희, 곧 리돼지도 그 전통에서 이해하면 될 성 싶다.
역사 기록을 보면, 리희가 죽은 후 그의 봉작을 이은 3대째 아들 대후轪侯는 장사를 떠나 수도 장안으로 가서 벼슬을 했고,
그 후 4대째 대후는 무관으로 군대를 함부로 출동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사면을 받고는 겨우 목숨을 남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저 리창의 이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를 근거로 리창 집안이 본래 남방 초나라 사람임을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다름 아니라 豨라는 말 자체가 돼지를 지칭하는 남방 초나라 말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전한시대 말기 양웅이라는 사람이 저술한 방대한 당시 중국 방언 사전인 방언方言 중 챕터 8에 이르기를 “猪……南楚谓之豨”, 곧, 표준어로는 猪[저]라고 하는 말을 남방 초나라[南楚]에서는 희豨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남방 초문화 특징에 대해서는 작은 챕터를 하나 두어 간단히 정리하기로 한다.
리창의 부인 무덤인 마왕퇴 1호 무덤이 미라로 유명하다면, 그의 아들 리희가 묻힌 3호 무덤은 무수한 문자자료를 출토해서 더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그 유명한 노자, 일명 도덕경만 해도 두 가지 판본을 쏟아냈고, 이 외에도 각종 방중서와 의서류가 쏟아졌다.
앞서 대후 가문 시조 리창이 지금의 마왕퇴에 묻힌 까닭은 그곳은 그의 땅, 예컨대 식읍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거니와,
그의 증손자 4대 대후轪侯 리질利秩[秩을 부扶로 쓴 데도 있다]이 죄를 지어 중앙 관직에서 해임되어 귀향한 데가 원적지인 강하군江夏郡 경릉현竟陵县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으니,
이에 따른다면 경릉현은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천문시天门市 일대라, 이곳에 대대로 터잡고 생활했을 것이다.
리질은 마왕퇴 3호 무덤 묘주이자 리창[대후 재위 기원전 193~기원전 185년)의 아들인 리희利豨(대후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111년)한테는 손자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낀 이, 다시 말해 리창의 손자이자, 리질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가 리팽조利彭祖[대후 재위 기원전 164~기원전 141년)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800살을 장수했다는 신선 팽조를 그대로 이름으로 갖다 썼다.
장사국을 절대 터전으로 삼는 리利씨 대후轪侯 시대는 이렇게 해서 초대 리창 이래 4대 리질에 이르기까지 대략 80년을 존속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즉, 전한 혜제惠帝 2년(기원전 193년) 4월에 장사국长沙国 승상丞相 리창利仓이 처음 봉작된 이래 대를 이어가다 한 무제 원봉元封 원년, 기원전 110년, 동해태수东海太守란 같은 반열로 취급받던 리질이 상부 지시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군사를 출동시켰다가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는 사면을 받기는 했지만, 그 사면에는 조건이 있었다.
공탁금을 내고 풀려난 셈인데, 대후라는 제후 지위를 포기하고 겨우 목숨만은 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장사국이라는 큰 제후국 안의 작은 제후국 대轪는 영영 사라졌다.
역대 대후轪侯와 재위 기간
利苍 前 193~前 185年 在位 始封之侯
利豨 前 185~前 164年 在位 利苍之子
利彭祖 前 164~前 141年 在位 利豨之子
利秩 前 141~前 110年 在位 利彭祖之子
뭐가 보이는가?
딱 위만조선 존속기간과 겹친다.
한 무제 시기에 이르면 봉국들이 이름만 남고 거의 중앙에 흡수되기 시작한다.
봉국이 남았다 해도 허울뿐인 시대로 접어든다.
이 무렵 남쪽 외신 남월도 망했다.
그림이 딱 그려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위만 왕가 무덤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최소한 제후국 안의 더 작은 제후국 저 무덤 이상은 되어야지 않겠는가?
평양엔 저 시대 저런 무덤이 없다.
이를 어찌 봐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