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다상, 비행기 사려고 그림을 팔다
꽤 오래 묵은 매화 등걸 하나가 있다. 솟구쳐오르다 퉁 하고 굽은 줄기는 잔가지를 다시 허공으로 솟게 만들었다.
그 잔가지에 흰 꽃이 가득 피었다. 때는 겨울에서 막 넘어온 봄이런가, 그 봄이 알알이 저 매화꽃잎 하나하나에 들어찼다.
오래 말았다 폈다 한 족자는 자연스레 꺾이는 현상이 생기곤 한다. 그 현상이 화폭 위에 선을 긋는다. 그 선은 그냥 선이 아니다.
어느새 그것은 잔잔히 피어오르는 윤슬이 되어 화폭 안을 고요한 연못으로 만들어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이 되어 연못 위에 푸른 봄 하늘빛을 우려낸다. 그래서인지, 화제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눈 같은 매화가 봄 연못을 가득 채웠네.
일류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제법 서정을 갖추고 먹의 농담을 운용한 이 작가는 구보다 료헤이(1872-1940?)라는 인물이다.
일본술 이름 '구보다'와 한자도 똑같지만 그 양조장과 관계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호를 텐난이라 한 이 사람은 일찍이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조선 땅을 밟았다.
자기 일에 힘쓰는 한편 그는 심신 수양의 방편으로 서화에 주목했고, 자신처렴 여가시간에 사군자나 글씨를 즐기고자 하는 총독부 관리나 교원, 일본인 유력자를 끌어들여 '조선남화원'을 창설한다.
여기엔 메이지 유신의 '원훈'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양아들이자 조선총독부 제2인자였던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1858-1927)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
그런 구보다 료헤이, 보통은 호를 이름처럼 써서 구보다 텐난이라고 하는 이 작가의 작품은 최근 들어 하나둘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아니 분명 예전부터도 있긴 있었겠지만, 좀처럼 '일본 작가'를 드러내길 꺼리는 독립 한국의 분위기, 그리고 조선에서 활동한 사람을 '듣보잡' 취급하던 당시 일본의 분위기상 '구보다 텐난'이란 이가 알려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재조 일본인 사회의 서화 애호 분위기,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의 한 극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자 사이에서 그가 드문드문이나마 언급되고 있는 데는 이런 사정이 깔려있다.
이 작품은 꽤 흥미로운 제작배경을 품고 있다. 왼쪽 아래, 아이 주먹만한 도장이 하나 찍혀있는데 이를 읽어보면 "위비기헌납회행각도작'이라, "비행기를 헌납하기 위한 그림 행각(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길) 도중에 그린 그림"이란 뜻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은 전쟁에 이기기 위한 자원 획득에 눈이 돌아있었다. 돈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버는 족족 저축하기를 강요했고, 국가에 헌납하기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또한 만들었다.
예술가들도 이런 데에 동원되기 일쑤였으니, 조선총독부 관료이자 꽤 이름이 알려진 서화가 구보다상도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혹 자의반 타의반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림을 그려주고 그 값을 받아 비행기 만드는데 보태는 '회행각'을 했던 것이다.
이 매화등걸도 그 결과 나온 작품인 셈이다.
그러면 이 작품은 빨라도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1938년, 아니면 1940년대 작풍임에 분명하다.
아마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그의 이 시기 행적이 나올 터인데 아직 찾아보진 못했다.
구보다 텐난의 몰년은 정확치 않은데, 생년이 1872년임을 감안하면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적어도 그의 나이 60을 훌쩍 넘긴 시점이다.
여기로 그리던 그림솜씨로 비행기 값을 보태야 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늙은 몸도 황국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수 있어 기쁘다고 여겼을까, 아니면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가 하고 자문자답하고 회의를 느꼈을까. 그야 알 수 없는 일이다.
남은 건 그가 굳이 도장을 찍어놓은 그림뿐이다.
매화향은커녕, 먹내음도 이제는 나지 않는다.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로는 참 흥미로운 그림을 봤지만, 소장자에겐 미안하게도 이 작품이 세상 빛을 그렇게 많이 볼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감상용이라기엔 그 뜻이 너무 처절하니 말이다-특히 우리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