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엎어버리는 삼근의 어금니] (1) 백제의 1차 멸망

공주 송산리 고분군, 요새는 공주 백제 왕릉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던가?
암튼 이 송산리 고분군이 웅진시대 백제 부여왕가의 공동묘지임은 명명백백하거니와 백제 당시엔 이 능원을 등관登冠이라 불렀다.
이에서 마련한 시스템이 웅진 시대에 곧바로 이어지는 사비시대에도 그대로 재현하게 되는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지금의 부여 백제 왕릉원이 그것이라.
이 두 왕릉원은
첫째 입지조건이 거의 똑같아서 얕은 산 볕이 잘드는 남쪽 산록을 정좌하며
둘째, 그 군집 또한 거의 똑같아서 두 왕릉원 모두 다닥다닥 붙여쌓기다.
셋째, 그 형식 또한 실상 판박이라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6호분처럼 벽돌무덤이 있으나 피장파장 석실분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물론 그 석실분도 내역이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그랜드 디자인이라는 측면에서 일맥으로 상통한다.
이는 그 전 시대 한성도읍기의 그것이랑은 실로 왕청나게 달라지게 되는데,
물론 한성시대 왕릉군은 어디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석촌동 일대 돌무지 무덤이라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방단 적석총이라 해서 네모 반듯이 단을 지어 쌓아올리는 그런 모양새라, 이 적석총은 규모가 열라리 크다.
그 한성시대 이런 왕릉급을 제외한 다른 지배층은 석실분이라, 결국 웅진시대 이래 왕가 묘제로 정착하게 되는 석실분은 한성시대 적석총을 버리고선 다른 지배계층 일반이 쓰던 석실분을 채택했음을 본다.
이 변화에 맞추어 능원은 평지에서 산록으로 아울러 이동한다.
이때문에 웅진시대랑 사비시대는 규모와 출토 유물에서 차이가 있을 뿐, 왕가의 왕릉이나 사대부가의 무덤 모두 근간은 같은 양식을 채택한다.
한성시대 왕가가 독점하던 시스템, 곧 평지 초대형 방단 적석총이 붕괴한 것이다.
나아가 왕릉이라 해도 규모가 현격히 작아지는데 솔까 규모로만 보면 웅진 이후 사비시대까지 왕릉이랑 다른 지배계층 유력가 무덤은 차이도 없는 평등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웅진시대가 개막하면서 왜 이런 '통합' 현상이 나타날까?

이는 아무래도 그 서막을 알린 475년 고구려-백제 전쟁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으니,
이 전쟁에서 백제는 패망에 가까운 참패를 겪었으니 그 와중에 개로왕이 적한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대굴욕을 맛봤다.
계속 이야기하지만 백제는 이때 실상 망했다.
제1차 백제 멸망이다.
그 백제가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이미 쑥대밭이 된 한성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비상대권을 쥔 문주가 계우 남은 병사 몇 명을 추스려 남쪽으로 냅다 도망쳐서 정착한 데가 바로 웅진, 지금의 공주다.
이 웅진시대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문주는 잠깐 왕위에 있다가 신하한테 암살당하고 그 아들 삼근은 13살인가 앉혀졌다가 3년도 채 되지 못해 사망해 버리고 만다.
그를 이은 동성왕은 비교적 장수하며 20년 백제 부흥을 이루는가 싶다가 그 역시 신하한테 목이 달아난다.
오직 무령왕만 제 목숨 겨우 부지해서 겉으로야 뭐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쉽사리 한성 패배라는 후유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문주와 삼근, 그리고 동성왕 초년까지 백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목숨 부지가 현안이었다.
왕릉?
이 판국에 무슨 한가롭게 왕릉만 다르다고 해서 한성 시대 그것처럼 규모도 크게 하겠는가?
제정신으로 간 왕이 없으니 서둘러 매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왕가의 체통이고 나발이고 그냥 일단 묻어버리고 봐야했으니,
편한 대로 위선 만들기 쉬운 형태, 곧 한성시대 사대부가가 쓰던 석실분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송산리 고분군 중에서는 이번에 재발굴한 1~4호분, 그리고 송산리 5호분이다.
그 무덤 봐라!
그게 무슨 왕릉인가?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왕릉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왕만 묻히지는 않았다.
일부 합장묘가 있지만 단독 무덤도 있어 왕비 혹은 국모는 따로 묻히기도 했다.
예서 우리가 하나 간과한 중대한 사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 망한 백제를 일으켜 세운 이는 신라였다는 사실이다.
신라가 백제를 중흥케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한성 패배 직후 백제는 명백히 신라의 부용국, 곧 신라의 식민지였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이 부용국으로서의 백제, 그 여실함이 무령왕릉 이전 웅진 초기 왕릉으로 짐작하는 곳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