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1) 문화재청장 서정배 (1) 풍납토성과의 운명적 만남

taeshik.kim 2024. 10. 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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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장 재임 당시 서정배

  
한국 문화재 정책을 총괄하는 부처인 문화재청은 그 모태를 구황실재산사무국을 삼는다.

이 기구가 1962년 1월 10일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시행되기 시작함으로써 문화재관리국으로 탈바꿈한다.

지금은 차관급 문화체육관광부 외청이지만 출범 당시는 지금의 교육부 전신인 문교부 산하 외국外局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궤를 같이한 문교부는 1990년 12월 26일 교육부로 개편되거니와 그것을 구성하는 국 단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현재에 견주어 권능은 형편 없었다.

초대 관리국장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을 역임한 한당욱. 

문화재관리국은 1967년 7월 24일 소속이 문화공보부로 넘어간다. 이름은 그대로 문화재관리국이었다.

문화공보부에서 공보가 따로 독립하자 문화부에서 계속 자리를 지킨다.

내가 문화재 분야에 발을 디딘 1998년 말에는 문화관광부 문화재관리국이었고 당시 국장은 정문교였다.

요즘은 국장이 고위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어 있지만, 당시 직급은 아마 3급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2급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1999년 5월 24일 김대중 정부가 문화재관리국 직급을 1급 청장으로 상향한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에는 마지막 국장 정문교가 재직 중이었다. 초대 1급 청장에 누가 임명될지가 문화재계에서는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 초대 청장은 그해 6월 12일 서정배로 뚜껑을 열게 된다.

그에 즈음해 초대 청장을 두고 하마평이 돌았다. 서정배 발표 직전 YTN에서 자막으로 정문교가 임명됐다는 한 줄짜리 기사가 떴다.

그런 소문이 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래서 대전 문화재청장실로 전화를 넣었더니 마침 정문교가 연결되었다.

우선 축하한다는 말을 하니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기분이 아주 좋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연락을 받았느냐 물어보니 받지는 못하고 YTN 뉴스를 봤다고 했다.

이거 영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 좋은 소식 기다립니다는 말과 더불어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서정배였다. 

서정배는 2001년 4월 17일일까지 초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한다.

퇴임 뒤에는 당시 문화재청 산하 유일한 법인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으로 가서 3년인가를 채웠다고 기억한다.

정통 문화 관료인 서정배는 내 기억에 고시 출신이 아니라고 기억한다.

내가 지금껏 겪은 공무원 중에는 최고로 치는 사람이다.

문화부 내부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공무원으로 알며 실제 문화재청장, 보호재단 이사장을 하면서 추진하는 업무 스타일을 보니, 정말로 건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 요란스럽지 않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바는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이 시기 서정배를 생각할 때 나는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문화재청장으로서 풍납토성과 경주 경마장 논란의 한복판에서 온갖 화살을 온몸으로 맞았고, 다른 하나는 보호재단 이사장 시절 관련 법을 바꾸어 국유재산 무상 사용 관리권인가를 얻어낸 일이었다.

풍납토성과 경주 경마장이 오죽 그 시절 폭탄이었던가?

그에 대해서는 나는 졸저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영사, 2000)에서 비교적 자세히 말했으므로 중언부언하지는 않겠다.

그것을 현장 보존하는 문화재위원회 회의가 열린 그날, 서정배는 대전에서 올라와 회의가 열리던 경복궁 안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지금 연구소는 대전으로 내려갔지만, 그때는 지금의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 뒤편, 지광국사현묘탑과 은행나무가 있는 뒤편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 사무동은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연구소 이전과 더불어 폭파되었다.

당시 소장실이 몇 층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3층 아니면 4층이 아닐까 한다.

맨 꼭대기에는 자료실이 있었으니, 이곳은 나에겐 엘도라도 같은 곳이었다. 내가 필요한 자료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서정배는 소장실에서 소장 조유전, 그리고 나 등 몇몇과 함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책에도 그리 되어 있고, 당시에도 나는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당시 풍납토성은 경당지구 발굴현장을 이곳 아파트 재건축 조합장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밀어버리는 불상사가 있어, 이것이 결국에는 풍납토성을 보존하는 데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마침내 경당지구와 경주 경마장 부지의 현장 보존 결정이 났다.

그 얼마 뒤 다른 자리에서 서정배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이야기가 풍납토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가 알기로는 결코 자기 분을 그리 쉽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목청을 제법 높이며 단호히 말했다. 

“문화재위원회가 못 지키면 내가 목숨 걸고 풍납토성은 지키려 했다. 보존 결정 때리고 떠나려 했다.”

난 이 말을 믿는다. 왜? 내가 아는 서정배는 그런 사람이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문화재 정책 모든 결정은 문화재청장이 한다. 당시에도 그러했다.

다만 그 전에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 위원회는 결정 기구가 아니다. 그런 심의 사안을 문화재청장에게 건의하는 기능만 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 적은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문화재 정책 결정에서 위원회는 권능이 막강하다.

서정배의 말은 문화재 위원회가 아파트 공사 강행을 결정했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거부하고 보존 결정을 했을 거라는 뜻이었다.

문화재위원회 심의 얘기가 나온 김에 나중에 그것을 뒤집어 엎은 변칙 청장 얘기도 해 볼까 한다.
(2016. 3. 11. 현재 기준으로는 또 달라져야 하는 대목이 있지마는 일단 이 기점으로 표준을 삼는다) 
 
*** 

저와 관련해 당시 아래와 같은 윤남순 선생 보탬이 있었다.

그는 공무원 생활 거의 전부를 문화부에서 보냈으며, 젊은 시절에는 문화재관리국 근무도 했다. 

문화재관리국은 국단위 기구였지만 당시는 독자적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외국(지금의 청 단위와 유사)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에 3대 외국이 있었는데 문화재관리국 외 수로국이 있었고 나머지가 통계국인가 그럴 겁니다,


외국은 국장급이지만 장관처럼 별도 권한을 가지고 자기 명의로 정부공문서를 생산하고 발송했습니다.

따라서 문화재관리국장은 외국장이었지만 국장급이었기에 2급 이사관이었고, 3급 국장급으로 문화재기획관과 문화재연구소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문교 국장님이 마지막 문화재관리국장인 것은 맞습니다, 제가 사무관때 공보관으로 모셨지요..

1급 문화재청은 노무현 정부 때 차관급 청으로 승격했는데 초대 차관급 청장에는 당시 1급청장을 하시던 노태섭 청장이 임명되셨습니다.

정문교 국장님과 노태섭 청장님 모두 제가 직접 모시던 분들인데 다 문화부 역사 속에서 한 페이지씩을 장식하신 분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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