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나소스 연무에 받은 신탁? 놓고 가야 할 것들
북한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지지만, 남한에는 해발 2천미터 넘는 산이 없다.
한라산이 그 턱밑까지 추격해 1950미터요, 지리산이 1905미터이며, 넘버 쓰리가 설악산이라 1708미터인가다.
북한을 합쳐 한반도는 산악 국가라 하지만 해발 3천미터가 넘는 산이 없다.
우리는 자꾸 더 높은 산을 찾아 선망하기도 하지만, 해발 천미터만 되어도 그 산은 영험의 징조를 자주 보인다.
델피 유적, 그곳 아폴론신전이 정좌하는 그리스 파르나소스산은 내가 테페를 거쳐 델피로 입성하면서,
또 델피를 탈출해 메테오라로 향하면서 그 산고개들을 넘어면서 절감했지만,
해발 2천400미터라 하지만, 그 펑퍼짐한 부피가 엄청나서 고갯길은 달려도달려도 끝이 없다.
그 봉우리와 기슭에는 시시각각 연무와 구름이 피어오른다.
델피 체류 둘쨋날, 아침 아폴론신전을 들어서자마자 빗방울이 치기 시작해 하루 종일 같은 날씨를 계속하더니만
지금 시각 아침 5시인 이튿날 오늘까지 메테오라 또한 마찬가지다.
이걸 보면 비구름이 그리스 북부 발칸반도를 덮었음이 분명하다.
덕분에 나는 메테오라 그 낙조를 날렸고, 오늘 아침 일출도 날렸다.
메테오라 이야기가 다음에 하기로 하고, 비가 그리 많이 내리지는 않았고, 조금 오래 맞으면 젖었다는 기분? 그럴 정도로 가랑비였다.
가랑비보다 좀 약한 비가 종일 내리니 이것도 미칠 지경이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리스 상륙 딱 한 달째인데 비는 처음이다.
내륙으로 와서 그런지 에게해랑 발칸반도 남쪽은 햇볕만 쨍쨍했으니 말이다.
아폴론 신전과 인근 델피고고학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서 이제 메테오라 향해 델피를 떠날 즈음, 파르나소스사 산으로는 기이한 경관들이 펼쳐졌다.
하긴 뭐 비오거나 비온 직후 이런 풍광이 꼭 파르나소스라 해서 그렇겠는가?
해발 200미터도 안 되는 우리네 서울 남산도 그러니 말이다.
연무가 피어오르고 구름을 중턱과 정상으로 걸쳤으니 선경이란 말은 실감한다.
왜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산으로 산으로 올랐을까?
첫째 산 그 자체가 주는 영험함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네는 이를 흔히 기가 있다고 말하며, 그 기를 영험함으로 간주해 그 기를 빨아들여야 무병장수하고 사회가 평안해진다는 믿음이 있다.
동진 도사 갈홍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산중 수양을 강조한 이유가 그것이며, 김유신이 하필 보검을 통해 하늘의 기를 받으려 들어간 곳이 인박산 깊은 산중 동굴이었겠는가?
둘째 산은 하늘과 가깝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드론이 판치며 인공위성 우주탐사선이 일상이 된 지금이야 그런 신비감이 덜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더 높은 데서 사해를 조망하겠다고 그곳을 찾는다.
물론 운동이라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겼지만 말이다.
산은 지상에서 신이 선물한 하늘과 가장 높은 땅이기에 그곳에 올라야 하늘과 접선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상을 지배하는 군주가 있듯이 천상 또한 그곳을 지배하는 질서가 있다.
그 주재자를 낮은 태양이라 여겼고 밤은 천황대제라 했으니, 약칭 천황이라 불렀다.
구체로는 북극성이 천황이었다.
지상의 그림이 산과 강과 물 삼박자가 빚어내는 하모니이듯이 천상은 삼광이 빚어내는 교향곡이다.
해와 달과 별 말이다. 이를 삼광三光이라 불렀으니, 김유신이 자기 큰아들 이름을 하필 삼광이라 지은 이유가 이에서 말미암는다.
지상에 들만 있으면, 하늘에 태양 하나, 달 하나만 있으면 지리地理, 천문天文을 그릴 수가 없다.
그 하늘, 저 우주만물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하늘을 접신하고자 사람들은 산으로 산으로 오른 것이다.
그런 사정이 그리스라고 별달랐을 것 같은가?
방어라는 그런 군사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올림푸스 산이니 이곳 파르나소스 산이니 하는 진짜 높고 영험함을 주는 산 말고도 왜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했겠는가?
그 아크로폴리스, 저런 영산들은 신이 주재하는 자리고 신이 정좌하는 곳이다.
이곳 파르나소스 산에도 아폴론 신전을 만들어, 그 신이 이 신전으로 강림하시어 신탁을 주기를 갈망한 이유가 있다.
그 신탁이 특히 비가 내릴 때, 연무가 피고 구름이 덮힐 때, 그때 더 강렬한 메시시를 발송한다.
물론 그 메시지가 꿈과 희망만 준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인간만사 어찌 저런 빛만 있겠는가?
나 또한 그 연무가 선물한 파르나노스 산, 혹은 그에 정좌한 아폴론 신탁을 받았으려나?
그 신탁은 희망일까? 아니면 절망에 대한 경고와 대비일까?
다만 바라건대 고국에서 한꾸러미 싸서 들고온 집착 원망 분노, 그리고 환멸을 부디 놓고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