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치는 삼근왕] (3) 웅진 초기에도 굳건히 백제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웅진도읍기 백제 왕가 묘역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종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2023년 9월이래 조사한 중간 성과를 그제 발표했거니와
개중에서도 1~4호분이라고 해서 왕릉원 가장 높은 지점에 나란히 일렬 횡대로 늘어선 무덤 네 곳을 조사하고는
식민지시대에 이미 몽땅 도굴당했거나 판 이 무덤들을 재발굴해서 무덤 구조를 재확인하고, 그나마 남은 유물들을 수습했다면서
그 중간성과를 요약하기를
1.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 무덤이 내부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 강 자갈을 채운 구조를 확인했다 했거니와 난 이런 데 관심 없다.
2.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 체계는 굳건히 유지되었다고 했거니와 이를 상론할 테니 잠시 뒤로 물리며
3. 웅진 도읍 초기에도 대외 교역망은 잘 유지되고 있었다면서
그 증거로 이번에 수습한 각종 유리 옥 1,000여 점 중에서도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한 납 성분이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됨에 따라, 당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교역망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했거니와,
그래? 난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
이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하고자 한다.
4. 2호분 주인공은 삼근왕(23대, 477~479)으로 추정된다면서 그 근거로 어금니 두 개 수습물을 들었으니
이 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되고 있고 나 역시 그 위험성을 충분히 경고했으므로 생략한다.
이제 이번 발굴이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 체계는 굳건히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하는 대목을 짚을 차례이거니와
개중에서도 무덤 주인공으로 삼근왕일 가능성을 제시한 2호분을 특히 주목하거니와
이 대목은 길지만 원문 인용한다.
출처는 국가유산청 보도자료다.
화려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2호분에서 출토된 청색의 유리옥이 달린 정교한 금 귀걸이의 경우, 백제 초창기인 한성기의 귀걸이와 웅진 후반기(무령왕릉)의 왕비 귀걸이의 중간 형태로 보임에 따라,
2호분에 묻힌 왕은 웅진 초기에 재위한 사실과 함께 당시에도 백제 왕실은 이미 높은 수준의 금세공기술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금 귀걸이와 함께 발견된 반지는 은에 줄무늬를 새기고 금을 도금했다.
재질은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의 반지는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웅진 초기 백제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또한,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칼 손잡이의 오각형 고리 장식은 앞서 나주와 논산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 당시 백제가 지방 수장층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보나마나 이한상 선생 주전공이라 자문위원이기도 한 그의 의견이 짙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거니와,
청색 유리옥을 박은 금귀걸이란 아래를 말하는 것이라

그 비교자료로 아래와 같은 같은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출토 왕비 귀걸이를 제시하는 한편


그 선후를 한 즈음 같은 백제문화권, 그리고 이웃 문화권 귀걸이 출토 사례를 지도와 함께 실물 자료를 첨부해서 비교자료로 제시한 것이니 이것도 보나마나 이한상 선생 작품으로 본다.
이제 저 중차대한 문제, 곧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 체계는 굳건히 유지되었다"는 그 언설의 타당성 여부를 본격으로 짚기로 한다.
[엎어치는 삼근왕] (2) 신라의 부용국 백제, 그 탄생 이야기
[엎어치는 삼근왕] (2) 신라의 부용국 백제, 그 탄생 이야기
근현대 한국사에서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고, 직후 3년은 미국의 식민지 내지는 부용국이었으며, 그 이후 한동안도 미국의 부용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냉혹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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