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호 해저에서 132년 만에 출현한 유령선
일가족 유람 나갔다가 난파한 웨스턴 리저브호

이 사고로 27명이 사망했으며, 사고 경위는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이 알 수 있다. 이 배는 오대호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침몰했다.
오대호를 항해하며 기록을 경신했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유서 깊은 강철선이 침몰한 지 100여 년 만에 발견되었다고 연구원들이 지난 3월에 발표했다.
웨스턴 리저브Western Reserve 호는 132년 전 백만장자 소유주이자 해운 재벌인 피터 G. 민치Peter G. Minch의 가족을 위한 여름 크루즈 여행 중 침몰했다.
더위를 피해 항해하던 이 배는 현재 슈피리어호Lake Superior 난파선 해안Shipwreck Coast으로 알려진 미시간주 일대에서 참사로 끝났고, 27명이 사망하고 단 한 명의 생존자만 남았다.

미시간주 어퍼 반도Upper Peninsula 해안에서 180미터(600피트) 깊이에 있는 이 난파선은 지난해 여름, 그레이트레이크 난파선 역사학회(Great Lakes Shipwreck Historical Society) 소속 연구원들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매니토웍Manitowoc에서 열린 위스콘신 수중 고고학 협회(Wisconsin Underwater Archeological Association) 연례 유령선 회의에서 이 기념비적인 발견을 발표했다.
"모든 난파선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어떤 난파선은 그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다"고 협회 전무이사 브루스 린Bruce Lynn은 말했다.
"피터 민치가 아내와 두 어린 자녀, 그리고 처제와 딸을 데리고 웨스턴 리저브호에 올라 호수 위를 항해하는 여름 크루즈에 초대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는 오대호가 일 년 중 언제라도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운다."

웨스턴 리저브호는 당시 잘 알려져 있었다.
318피트(약 90미터) 길이의 이 배는 오대호에서 최초로 100% 강철로 제작된 선박 중 하나였다.
"내륙의 그레이하운드inland greyhound"라는 별명을 가진 이 배는 빠른 속도와 호수에서 가장 안전한 선박 중 하나로 유명했다.
린은 이 배가 당시 밀워키로 석탄을 가장 많이 실어 나른 기록을 세웠다고 말했다.
민치는 이 배에 오하이오 북동부 이리호Lake Erie를 따라 위치한 3백만 에이커(약 136만 헥타르) 규모의 땅 이름을 붙였다.
1892년 침몰 사고로 또 다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유일한 생존자가 들려주는 참혹한 이야기
웨스턴 리저브가 무너졌을 때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유일한 생존자인 휠맨wheelsman 해리 W. 스튜어트Harry W. Stewart의 입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1892년 8월, 클리블랜드를 출발하여 미네소타주 투 하버스Two Harbors로 향하던 화물선은 이 항해가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
배에는 민치의 아내 안나Anna, 9살 찰리Charlie와 6살 플로렌스Florence, 그리고 안나의 여동생 메리 잉글브리Mary Englebry와 그녀의 딸 버사Bertha(10살)가 타고 있었다.
다른 선장인 앨버트 마이어스Albert Myers는 19살 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배는 8월 30일 슈피리어 호 화이트피시 만Whitefish Bay에 도착할 때까지 순항했다.
하지만 바람이 거세지고 날씨가 바뀌었다.

민치는 처음에는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ballast water가 배를 짓눌렀고 화물은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원들은 외해open water로 향했고, 지금은 슈피리어 호의 난파선 해안이라고 불리는 위험으로 악명 높은 지역에 들어섰다.
린에 따르면 화이트피시 만Whitefish Bay에서 침몰한 선박은 약 200척 이상이라고 한다.
화이트피시 포인트Whitefish Point에서 북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곳에서 강력한 폭풍이 배를 덮쳤고, 배는 오후 9시경에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배는 약 10분 만에 침몰했다.
대부분의 선원은 금속 구명보트에 탔고, 가족들은 나무 구명보트에 탔다. 금속 구명보트는 곧바로 전복되었다.
스튜어트를 포함한 두 선원만 나무 구명보트에 올라탔다.
그들은 약 10시간 동안 표류했다.
증기선이 지나갔지만, 어둠과 비 때문에 생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구명보트는 결국 슈피리어 호 남동쪽 해안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서 전복되었다.
스튜어트만 육지에 도착했다.
린은 "해리 스튜어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웨스턴 리저브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난파선 발견
웨스턴 리저브는 그레이트 레이크 난파선 역사 협회Great Lakes Shipwreck Historical Society가 2년간 수색한 끝에 발견되었다.
린은 연구원들이 7월 22일, 연구선 데이비드 보이드호David Boyd에 탑재된 소나를 사용하여 잔해를 처음 발견했다고 말했다.
해양 운영 책임자인 대릴 어텔Darryl Ertel과 1등 항해사인 댄 어텔Dan Ertel이 처음으로 이 배를 발견했다.
원격 조종 배가 난파선이 웨스턴 리저브호임을 확인했다. 이 배는 슈피리어 호 화이트피시 포인트에서 북서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수심 약 180미터 지점에 두 동강이 났다.
"300피트 길이 웨스턴 리저브호가 해안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폭풍우에 휩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목이 멍했다."
대릴 에르텔은 말했다.
"스콜squall은 언제 어디서든 예기치 않게 발생할 수 있다."
린은 배의 종bell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페인트와 같은 많은 세부 사항들이 여전히 보인다고 말했다.
난파선이 웨스턴 리저브호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배에서 발견된 유일한 물건과 일치하는 등이었다.
이 등불은 현재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있는 국립 오대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신문 기사는 이 배의 취약한 강철 구조에 혹평을 내렸다. 많은 사람은 이 최첨단 선박이 악천후와 파도를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린은 말했다.
웨스턴 리저브호의 자매선인 W.H. 길처호Gilcher 역시 2개월 후에 침몰했다.
에드먼드 피츠제럴드Edmund Fitzgerald 호 난파의 진실
난파선 박물관Shipwreck Museum에 따르면, 오대호에는 무려 6,000척 난파선이 있으며, 이 중 3만 명이 사망했다.
가장 유명한 선박은 1975년 침몰해 29명이 사망한 화물선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다.
이 선박은 웨스턴 리저브와 같은 지역에서 침몰했다.
캐나다 작곡가 고든 라이트풋Gordon Lightfoot은 그의 잊을 수 없는 노래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난파The Wreck of the Edmund Fitzgerald"로 이 참사를 기렸다.
라이트풋의 노랫말은 이 참사의 원인을 "11월의 마녀Witch of November"로 규정하는데, 연구에 따르면 이 폭풍은 오대호에서 기억에 남을 만큼 맹렬한 폭풍의 원인이자 수많은 난파선의 원인이라고 한다.
기상학자 스티브 호스트마이어Steve Horstmeyer와 지리학자 메이스 벤틀리Mace Bentley가 1998년 웨더와이즈(Weatherwise) 잡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마녀가 분노하여 가마솥을 휘젓는다면, 아무리 큰 배라도 오대호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고 한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면서 극지방 제트 기류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오대호에 울부짖는 바람과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
벤틀리에 따르면, 이 시기는 오대호에서 가장 위험한 때다. 오대호에서 발생하는 선박 난파 사고의 약 40%가 11월에 발생했다.
이 폭풍은 허리케인에 버금갈 수 있다. 폭풍에서 살아남은 해당 지역 다른 선박에 따르면,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를 침몰시킨 폭풍은 시속 67마일(약 104km/h)의 강풍, 최대 시속 86마일(약 136km/h)의 돌풍, 최대 35피트(약 10미터)의 파도를 겪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호는 폭풍이 가장 심하게 몰아칠 당시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과 파도가 화물선 현측을 강타했는데, 화물선은 화이트피시 만으로 안전하게 남쪽으로 피난하려 했다.
화이트피시 만에서 약 17마일(약 27.6km) 떨어진 미시간 주 수세인트마리 Sault Ste. Marie와 온타리오 주 수세인트마리 인근 수심 530피트(약 166m)에서 침몰했다.
오대호 전역의 난파 사고
오대호의 재난은 화이트피시 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대호 역사상 최악의 난파 사고 중 하나는 1860년 미시간 호에서 발생했다.
252피트 길이 여객선 레이디 엘긴Lady Elgin 호가 일리노이 북부 해안에서 폭풍우 속에서 다른 선박과 충돌했다.
이 선박은 침몰했고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휴런 호Lake Huron에서는 다니엘 J. 모렐 호Daniel J. Morrell도 11월의 맹렬한 폭풍으로 침몰하여 29명이 사망하고 단 한 명만 생존했다.
이 화물선은 1966년 시즌 마지막 운항을 하던 중 시속 70마일(약 112km)의 강풍과 25피트(약 7.6m) 높이의 파도를 만났다. 선박은 두 동강이 났다.
40시간 후 해안경비대 헬리콥터가 경비원 데니스 헤일을 포함한 승무원 한 명만 구조했다.
오대호 중 수심이 가장 얕은 이리 호는 세계에서 난파선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호수 중 하나다.
2,000척이 넘는 선박이 이 호수에 침몰했지만, 그중 400척만이 발견되었다.
최악의 사건 중 하나는 1850년 G. P. 그리피스Griffith 호 침몰 사건이었다.
300명이 넘는 승객을 태운 이 배는 오하이오 해안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약 250명에서 295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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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호가 아무리 넓다 해도 내륙 바다 호수라서 좀 안전할까 했더니 전연 딴판인 모양이라,
사고 빈발 지점은 딱 우리네 태안 앞바다 마도 섬 난행량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