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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11) 불륜 너머 반란을 뽑아낸 점필재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3.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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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 사건 주요 무대인 경주 서출지書出池. 미래를 예언하는 문서[西]가 나온[出] 연못[池]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백일홍으로 유명한 곳이다.

 
 
놀랍고 놀랍고 또 슬프고 슬퍼라 / 怛怛復忉忉
임금님 자칫 목숨 잃을 뻔했네 / 大家幾不保
오색 장막 속 현학금 거꾸러지니 / 流蘇帳裏玄鶴倒
어여쁜 왕비 해로하기 어렵구려 / 揚且之晢難偕老
슬프고 놀랍고 슬프고 슬퍼라 / 忉怛忉怛
귀신이 알리지 않았으면 어쩔뻔 / 神物不告知柰何
귀신이 알려져 나라 운수 길어졌네 / 神物告兮基圖大
 

점필재는 저 사금갑 사건을 소재로 꺼내면서 이리 읊었다. 

이 달도가怛忉歌는 주시해야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주시해야 하는가? 

점필재가 사금갑 이야기를 소비하는 맥락이다.

어떤 맥락인가?

이 사금갑 이야기는 모두가 궁주宮主(삼국유사) 혹은 왕비(삼국사절요·동국통감)의 불륜에 초점이 갔다.

다시 말해 왕비 혹은 궁주가 불륜을 일삼다 그 현장을 들키는 바람에 그 불륜 상대남인 승려와 더불어 복주伏誅되었다 했다. 

한데 이 관점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점필재는 반란을 들고 나온다.

그 관점이 저 시에서 반복된다. 

"임금님 자칫 목숨 잃을 뻔했네"라든가 "귀신이 알리지 않았으면 어쩔뻔 / 귀신이 알려져 나라 운수 길어졌네"라 한 대목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귀신이 먼저 반란 조짐을 알고 알려서 미연에 방지를 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래면 임금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요지다. 

이는 저 달도가 앞에 점필재 본인이 부친 서문에서 다시금 드러나는데, 그 배경 설명을 겸한 서문은 이렇다. 


소지왕炤知王 10년[488]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서 노니는데, 어떤 노옹老翁이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이 이르기를 “(이 편지 혹은 문서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했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게 하는 것보다는 뜯지 말아서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인庶人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왕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뜯어서 보니, 그 글에 “금갑을 쏘아라[射琴匣]”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왕이 왕궁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는 벽을 기대고 그를 쏘아 넘어뜨리고 보니, 바로 내전內殿의 분수승焚修僧이었다.

왕비가 그를 데려다 간통을 하고 이를 빌미로 왕을 시해하려고 꾀했었으므로, 이에 왕비도 복주伏誅되었다.


곧, 점필재는 이 사금갑 이야기를 소지왕, 곧 비처왕에 대한 반란, 혹은 그에 따른 시해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점필재 이해가 타당한가?

우리는 저 사금갑 사건을 논하면서 불륜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사실이다.

솔까 모조리 불륜이라는 관점으로만 접근했다. 

하지만 저 사건을 전하는 모든 기록이 공통하는 분모가 있다.

그것은 저 점필재도 저 서문에서 지적한 그 대목, 바로 “(이 편지 혹은 문서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했고, 그 한 사람이 바로 왕이라는 선언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단순한 왕비의 간통이 아니라, 그 간통이 소지왕 폐위 혹은 시해를 염두에 둔 사건이었다. 

소지왕비가 내전 분수승과 실제 간통을 해서 폐위 복주되었는지 아닌지는 현 시점에서 논외로 두고,

저 사건은 소지왕 10년에 왕을 폐위하려는 음모 혹은 반란 계획이 있었다는 복선이었다. 

김종직은 이 점에서 매우 예리했다.

저 사건을 왕비 간통 사건을 넘어 이후 그 어떤 역사학도도 주목하지 못한 저 대목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유사 사금갑 이야기에서는 저 사금갑 사건에서 유래했다는 세시풍속 이야기, 곧, 밑도끝도 없이 전후 맥락이 전연 연결이 되지 않은 사금갑 2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 후로는(사금갑 사건이 있고서-인용자) 나라 풍속이 매년 정월의 상진일上辰日·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온갖 일을 금기하여 감히 움직이지 이를 지목하여 달도일怛忉日이라 했다.

한데 굳이 이 네 날을 지목한 것은 그때에 마침 오烏·서鼠·시豕의 요괴가 있어 기사騎士로 하여금 추격하게 한 결과 용龍을 만났기 때문이다.

또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祭를 지내었다.


보다시피 삼국유사 관련 기술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덧붙여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는 삼가는 날로 세 날을 지목했고, 나아가 기오일을 15일을 지목했다는 점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기오일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정월 15일 대보름이 아니라, 실은 그 다음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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