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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13) 믿을 수 없다면서도 다 채록한 안정복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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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동사강목 부록에는 괴설변증怪說辨證이라는 섹션이 있다.

주로 합리주의 관점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변설한 내용을 묶었으니,

이에서 안정복은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왜 믿을 수 없는지를 집중 토론한다. 

개중 하나로 저 사금갑 사건이 걸려든다. 

그 부록 상권 중中에 이 코너는 실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는데,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살피시오.” 라고 했다.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니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렸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그 겉봉에 씌어 있기를, “이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고 했는데

이를 일관日官한테 문의하니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고 했다. 

왕이 떼어 보니 그 글에, 금갑琴匣을 쏘라고 씌어 있으므로 왕이 곧 궁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 활을 쏘니,

거기에는 곧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곧 복주되었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은 만약 까마귀[烏]·쥐[鼠]·용龍·말馬·돼지[猪]의 공로가 아니었다면 왕이 죽었을 것이라 해서 마침내 정월의 상자上子·상진上辰·상오上午·상해上亥 등 날짜에는 온갖 일을 삼가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면서 신일愼日이라 했다.

15일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으로 하늘에 제사하니 지금까지도 이를 행한다.

그리고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라 했다.

 
안정복은 삼국유사에서 인용했다 했지만, 삼국유사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삼국유사 사금갑 이야기는 불합리한 구석이 너무 많아 그것으로써는 이 사건과 그에서 비롯하는 세시풍속이 설명이 안 된다.

이 점을 안정복 역시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런 까닭에 저런 이야기를 전재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에 협주夾注로 여지승람輿地勝覽 기록도 섞어 인용한다 한 것이다. 
 

오기일에서 유래하는 찰밥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한가?

그래서 이를 안정복은 다음과 같이 변설辯說한다. 


상고하건대 용龍은 노인을 가리킴이요, 말은 기사가 탄 것을 말함이니 이 말이 더욱 허황하다.

본사本史[삼국사기를 말함-인용자]에는 보이지 않고, 동국통감 및 동사찬요는 모두 삼국유사를 근본하였으되 그 글이 다르니, 다시 무엇을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에서 안정복 역시 삼국유사 사금갑과 동국통감이 말하는 사금갑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만 안정복 시대에는 그 같고다름을 판별할 수 있는 사금갑 원전 A가 이미 망실되었음을 엿보게 된다.

그 원전이 있었더래면 안정복 자신이 이를 따로 변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변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이 해마다 이날이 되면 찰밥으로 까마귀에 제사하고, 또 용은 비를 주고 말은 부지런히 수고하여 사람에게 공로가 있으며,

돼지와 쥐는 곡식을 소모하므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 하여, 해마다 연초의 진일辰日·오일午日·해일亥日·자일子日이 되면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며,

백사百事를 금하고 서로 어울려 즐겁게 놀면서 신일愼日이라 이르니,

이는 모두 괴이한 말을 취합한 것으로서 말이 되지 않는 사실이라 모두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안정복은 괴이한 말이라 해도 저런 방식으로 기록을 채록했으니, 역사가다운 면모라 하겠다.

그것을 채록하면서도 믿을 바가 못된다는 방식으로 선대 기록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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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12) 왕비 선혜 부인을 들고 나온 안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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