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바리 시체 쟁여 넣은 경주 쪽샘지구 신라 돌방무덤
그제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발표라,
이르기를 경북 경주시 황남동 18-1 쪽샘지구 유적에서 K91호 무덤이라고 명명한 신라시대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과 J230호 무덤이라는 딱지를 붙인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을 조사한 결과
K91호 돌방무덤이 쪽샘지구에서 현재까지 드러난 1천300여 기에 이르는 무덤 중에서는 가장 먼저 드러난 돌방무덤임을 확인하는 한편
이 무덤이 깬돌을 사용하여 네 벽을 쌓아 만든 무덤방(길이 2.9m, 폭 2.3m)에서 시신과 껴묻거리를 안치한 공간으로 5곳을 세분했음을 드러났다고 한다.
방 가장 안쪽인 북쪽 벽에 붙여 폭 76cm, 높이 15cm 시신 받침(엄밀히는 널 받침이다)을 만들고,
그 위(엄밀히는 시신을 관짝 안에 넣었다고 해야 한다)에 금귀걸이 한 쌍을 착용한 시신을 안치한 것이 최초(1차) 매장이이라고 발표했다.
뭐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무덤 구조를 봐도 가장 후미지고 가장 넓은 곳에 무덤 주인공을 모시지 않았겠는가?
이 주인공 주변에서는 미늘쇠, 철제 낫, 운모와 같은 흔적이 드러났다 한다.
또 운모가 나왔어?
시신받침이 있는 곳을 제외한 무덤방 바닥은 자갈돌을 깔았다고 했으니 뭐 볼짝 없다.
사람 이부자리도 요를 까는데 무덤이라도 안 깔겠는가?
이 무덤은 2023년 이래 올해까지 총 3차례(1차 무덤방[玄室]), 2차: 널길[羨道·墓道]과 봉토[封土], 3차: 시신받침[屍床])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다 한다.
미늘쇠는 왜색 짙은 말로는 유자이기有刺利器라고 하는 것으로, 긴 철판 양 가장자리를 삐쳐내어 가시가 돋친 것처럼 만든 기물로 장대에 끼워 의례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지만, 글쎄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른다.
이 무덤은 돌방무덤이기에 한 번 매장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에 사람이 죽으면 다시 문을 따고 들어가 시신을 추가로 안치한다.
이 무덤 역시 2·3차 매장을 한 흔적이 확인됐으니, 1차 시신받침 남쪽에 붙여 1차보다 높은 31cm 높이에 폭 78cm, 폭 79cm 시신받침을 각각 만들어 시신과 껴묻거리를 안치했다 한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4차 매장 또한 했다고 하는데, 이르기를 3차 시신받침 남쪽에 디시 붙여서는 폭 70cm, 높이 31cm 시신받침을 만들었으나 공간이 좁아 널길까지 확장해 추가 매장이 이뤄졌다 한다.
연구소에 따르면 2~4차 매장에서는 금동제 허리띠 장식, 철제 손칼, 미늘쇠, 쇠도끼, 병甁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었거니와 여러 차례 매장이 중복되는 바람에 흐트러진 채 출토되었다 한다.
개판 일보전이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고서도 5차 매장을 했다 하는데, 뭐야? 아파트야? 연립주택이야?
이 5차 매장은 이전 매장과 달리 남북 방향으로 긴 부장 공간을 만들었는데(4차까지 매장은 동서 방향 장축이라는 뜻인 듯하다.) 동쪽 벽에 붙여 폭 50cm, 높이 20cm로 만들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굽다리접시와 같은 도기류를 넣었고 좁은 공간 때문에 시신 안치는 기존 2~4차 시신받침을 재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다.
무덤 방 남쪽 벽에 오른쪽(어느 기준으로 오른쪽이야? 무덤길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 기준이야? 무덤 안쪽 주인공들 기준이야 뭐야? 이딴 망발은 삼가야 한다. 동서쪽인지 절대 방향을 표시해야 한다.)으로 치우친 널길은 바닥 면이 안에서 밖으로 갈수록 높아지고, 바닥 전면에는 자갈돌을 한 벌 깔았다.
무덤길 서벽 일부를 먼저 있던 돌무지덧널무덤(K255호) 둘렛돌을 그대로 이용한 점, 무덤길 남쪽 끝을 먼저 있던 돌무지덧널무덤(K254호)에 덧붙여 만든 점이 독특한데,
이를 볼 때 돌방무덤에 묻힌 사람은 주변 돌무지덧널무덤에 먼저 묻힌 사람들과 가족 등 긴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무덤방 천정이나 방을 덮은 봉토는 남아 있지 않지만, 무덤 방 주변으로 돌린 2개 돌렬[石烈]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확장하면서 봉토를 쌓는 ‘양파형 성토법’으로 축조했을 것으로 보인댄다.
양파형? 이건 무슨 개소리야? 이딴 말 왜 써?
이 방식은 한반도에서는 경주 용강동 고분군, 황성동 고분군, 방내리 고분군 및 일본의 효고현 미다니箕谷 고분군, 아이치현 젠다나膳棚 고분군, 나가노현 오오무로大室 고분군 등지에서 돌방무덤 봉토를 쌓을 때 사용했다 하는데,
이런 껍데기 기술 아무 의미 없다. 그건 개돼지나 하는 말이다.
출토 유물들로 보아 이 돌방무덤은 6세기 중·말기 무렵에 만들었다고 본댄다.
돌방무덤은 쪽샘지구에서는 처음 확인했으며 주변 일대 대릉원 일원 전체에서도 7기 정도만 확인됐다.
조사단은 "이번 조사를 통해 6세기 이후 신라 지배층 무덤 형태가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화하는 모습, 나아가 당시 사회 집단 또는 계층별 무덤군의 장소 선정이나 장례 방식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한다.
그런가?
내가 볼 때 중요한 대목은 이딴 거지 같은 껍데기 변화가 아니다.
저네들 발표에 의하면 5차에 걸친 매장이 있었다 하거니와 그 마지막이 무덤 장축이 남북 방향으로 변한 대목 아니겠는가?
그 이전 신라 문화권 지배적인 무덤 배치 양상은 동서 장축이며, 머리는 동쪽으로 두지만, 어느 시점, 구체로 보면 6~7세기 교체기 무렵에는 남북 방향으로 바뀌고, 머리는 북쪽을 향해 둔다.
이는 완연한 중국식 예제 도입의 우뚝한 증좌이거니와, 이번 발굴에서는 그 양상을 이처럼 명확하게 말해 준다.
그만큼 무덤 장축 변화는 한국문화사에서 중요하다.
저를 고비로 일제히 한반도 문화는 중국을 시발로 삼는 장송 문화로 편입한다.
조사단은 나아가 함께 조사한 덧널무덤에 대해서는 "구덩이를 파고 길이 3.4m, 폭 0.8m 나무 곽을 짜서 넣은 뒤 구덩이와 나무 곽 사이 돌을 채운 형태로, 내부에는 시신과 함께 철제 창, 큰항아리, 컵모양 토기 등을 부장하였다"고 하거니와
유물로 보아 쪽샘지구에서는 드문 4세기 후반 무렵에 만든 무덤으로 추정한댄다.
쪽샘지구는 5~6세기 신라 지배층 공동묘지다.
모든 공동묘지는 존속기간이 50~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거니와, 그 양상이 쪽샘지구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한데 그런 집중한 시기를 벗어나 그런 공동묘지가 본격 등장하기 전에도 간헐로 무덤을 썼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런 민간성 묘지가 국립묘지로 변했다? 묘지령이 발동됐다.
이 묘지령을 읽어내야 한다.
이 돌방무덤은 그렇게 묘지령을 통해 조성한 국립묘지가 이제는 미어텨져 더는 기능할 수 없을 시점 비집고 들어간 종말기 무덤이다. 왜 비집고 들어갔을까?
그 존속기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나는 본다.
저 국립묘지는 어느 시점에 일체 추가 매장이 중단됐다. 또 다른 폐지 묘지령이 발동한 것이다.
이 묘지령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나아가 이 무덤 반경 20m 안짝에서는 크기가 비슷한 덧널무덤이 무리 지어 있는 데 반해, 동쪽에서는 5세기에 만든 지름 10m 이상 돌무지덧널무덤이 무리 지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쪽샘지구 무덤떼가 시기별, 계층별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라고 본댄다.
지금까지 말하는 발굴성과란 글자 그대로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며, 진짜 발굴은 그 내부에 대한 과학조사에서 나온다.
그 과학조사를 어떤 방식으로 어찌 진행할지는 두고 봐야겠다.
파제끼는 일이 능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