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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숙권](6) 복수심 불타는 상주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2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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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명종실록에 의하면, 이 황당선 표류인 대량 학살 사태는 유충정柳忠貞이라는 사람이 끼어드는 바람에 더욱 확대된 측면이 있다. 

그는 현감縣監을 지낸 전직 공무원으로서, 이 사건 당시에는 전前 현감이라 했으니, 퇴직자 신분이었음이 확실하다.

다만, 그가 퇴직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은데, 부모 혹은 조부모 상을 당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그를 상인喪人, 곧 상중에 있는 사람으로 실록이 묘사한 것도 이때문이라고 본다.

보통 이런 사람은 삼년상이 끝나면 재임용된다.

암튼 마침 이때 저 대량학살이 벌어진 녹도라는 섬에 그는 관재를 구할 요량으로 들어가 있었다.

물론 장례에 소요하는 목재를 구하러 들어가는 길에 혼자 덜렁 들어갔겠는가?

식솔 혹은 일꾼들과 함께 들어갔을 것이다. 

한데 재수가 옴 붙었는지, 그가 녹도로 들어갔을 적에 "의복과 식량을 빼앗기고는 힘을 합해 서로 싸웠다"고 실록에는 묘사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녹도는 표류한 중국 해적들과 조선 관군이 맞붙은 아수라장인 상태였고, 그 와중에 폭도로 변했을 중국 해적들이 유충정을 약탈했음에 틀림없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유충정은 관군에 합세해 칼을 휘둘러 해적을 물경 36명이나 참획한다. 

이로써 보건대 유충정은 무관이었음에 틀림없다.

현감이라는 백으로 진출한 한량 사대부나 무관들이 진출하는 자리인 데다, 그 행적을 보아 칼잽이였다.

36명이 베었다는 말이 과장일 수도 있지만, 이 해적 집단이 꼭 칼잽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니 전연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 하겠다. 

한데 이 일이 수습 과정에서 중앙 조정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황당선을 왜선으로 오인한 초기 판단은 잘못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당시 상황에 녹도 현지 혹은 흥양현에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기나 했겠는가?

중국인 혹은 조선인으로 위장한 왜적도 천지였으니, 이를 현지에서 판별할 사정도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나아가 황당선은 일본을 오가는 무역을 사칭했지만, 실은 해적이었다.
해적이라 해서 꼭 캐러비안 해적만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일가부치를 거느린 가족이 포함됐고, 먹고 살려면 칼잽이만으로는 할 수 없었으니 그 구성원은 생각보다 더 다양했으니 온갖 인간군상 다 포함된 집단이었다. 

400명이나 되는 그런 대규모 해적이 느닷없이 흥양현 녹도에 나타났으니, 이것이 어찌 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는 와중에 무혈 충돌이 발생해 저런 대량 학살로 빚어졌으니, 조선 정부는 이런 일이 중국에 알려질까, 나아가 그런 일로 추궁을 받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까닭에 사태를 이리 키웠다 해서 현지 담당자들을 국문하기로 한다. 

유충정은 상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그를 향한 비난이 쇄도했으니, 현직도 아닌 자가, 더구나 상중인 자가 본분을 망각하고선 알량한 충성으로 환신을 사려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게 된다. 

거꾸로 해적한테 의복과 식량까지 다 빼앗긴 사람이 그럼 어찌해야했을까? 가만 있어야 했겠는가?

그가 칼을 잡은 까닭은 복수심이었다.

이 일로 공을 세워보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도둑맞은 옷가지와 식량을 찾아야했다. 

그가 눈을 부라리고 관군에 협력해 해적 소탕 작전에 나선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함에도 그에게는 갖은 죄목이 뒤집어 씌워졌으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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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숙권](5) 바다를 배회하는 캐러비안 해적 황당선荒唐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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