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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한성백제’와 그 탄생, 특히 문화재 탄생의 추적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7. 1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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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한성백제’와 그 탄생의 추적 

김태식 국토문화유산연구원 전문위원  
 

발표자 오영찬 선생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래 봉직하다 지금의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으니, 마침 박물관 봉직 시절, 그리고 이후에도 그 박물관이 보유한 총독부 시절 각종 문서들을 이용한 활발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거니와, 이번 발표 또한 그런 특장을 유감없이 발휘한 좋은 발표라 생각한다.

토론자는 풍납토성을 필두로 몽촌토성이니 석촌동고분군이니 하는 데는 이가 갈릴 정도로 애증이 교차하는 현장이어니와, 그렇게 이가 갈릴 시절엔 발표자가 이용한 자료들은 접근조차 쉽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그때는 하다못해 그 시절 송파 일대 문화재 분포양상을 점검하고자 총독부가 작성한 오반분지일 지도 한 장을 스캔하러 온 도서관을 돌아다닌 시절이었다.

그만큼 자료가 없던 시절이 아니라, 접근 자체가 어렵던 시절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애타게 그 시절 발표자가 찾아 돌아다니던 자료 뭉치가 지금 발표자 발표를 보니 국립박물관 서고에 있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선 토론자의 허망한 발견이다. 

올해는 토론자가 그 파장 크기에서는 한국전쟁의 그것을 능가하거나 맞먹는다 항용 말하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발발 1세기를 맞는 시점이라, 풍납토성과 그 한강 상류 암사동 유적은 아다시피 그 미증유하는 대참사가 준 선물이었다.

이번 학술대회 개최 취지도 그렇고, 그에 맞춘 발표자 발표 역시 토론자는 을축년 대홍수 발발 1세기를 기념하면서 지금의 우리한테 이 대참사가 무엇인지를 새삼 상기하면서, 구체로 들어가 아주 간단히 문화재의 발명, 그 궤적의 추적에 핵심이 있다고 본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발표문 곳곳에, 혹은 간헐로 드러나는 논급에서 유추하게 되는 핵심이 토론자는 바로 문화재의 탄생이라 본다. 

‘문화재’는 역사 이래 자고로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라 시대가 필요에 따라 발명하고 호명한 근대의 새로운 존재다.

토론자는 요새 이 존재를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거니와, 문화재는 느닷없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 문화재가 탄생하는 지점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토론자는 바로 발표자가 집중해서 다룬 식민지시대 한성백제 유적의 등장이라고 본다. 

발표문 곳곳에 지적하듯이 한성백제는 느닷없이 하늘에서 어느 날 뚝 떨어졌는데, 존재감 제로인 이 한성백제 500년이 야금야금 존재를 드러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출현했으니 이 어찌 사건이 아니리오?

그에 앞선 점검으로 조선시대 증언들에 보이는 희미한 백제의 편린들을 잘 정리하면서 발표자는 식민지 시대에 집중해 그것이 어떤 과정들을 거쳐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 혹은 결과물이 아주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실체로서의 한성백제, 곧 문화재라는 개념을 장착한 한성백제가 그 식민통치가 끝나는 시절에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믿기는가? 한성백제 오백년이 1945년까지도 냉혹히는 없었다는 사실이? 

이런 백제가 이후 1970년대 석촌동 발굴과 1980년대 몽촌토성을 거쳐 90년대 이래 풍납토성 발굴을 거쳐 비로소 그림으로 완성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 

발표자가 천착한 식민지시대를 포함해 한성백제가 어떤 과정들을 거쳐 발견 발명되었는지 하는 추적을 실은 토론자로서도 아니해 본 것 아니라, 2000년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는 그 전초였고, 오늘 토론 좌장을 맡게 되는 권오영, 그리고 또 다른 발표진 신희권 교수도 참여했다고 기억하는 그 작업 말단에 이름을 끼어 언론에 드러난 그 양상을 정리한 적 있으니,

그 보고서는 서울시에서 아마 조사보고서로 나왔을 것이라, 일정 부문 그 대목과 겹치는 듯해서 토론자로서는 몹시도 반갑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번 발표가 주는 가장 든든한 무기는 식민지시대 한성백제 편린의 제1차 문건 정리라 하겠다.

그 과정에서 을축년 대홍수가 준 최고의 선물, 곧 그 풍납토성 초두 구매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 가격까지 적혀 있다는 문서까지 공개한 일에 박수를 보낸다. 

발표자가 집중해서 다룬 식민지시대 한성백제의 편린들은 총독부 문건, 혹은 그 정책에 집중했지만, 실은 생각보다 그 외곽에도 적지 않은 증언들이 포진한다.

예컨대 그 시절 가장 중대한 문건인 1925년 인류학도 기요노 겐지[清野謙次]의 풍납토성 탐방기를 필두로 하는 문건들이 발표문에는 인용되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자료들이 여전히 손길을 기다린다.

이에 즈음해 토론자는 오늘 자리를 주선한 연구소에다가 발표자가 동원한 자료들을 필두로 저와 같은 식민지시대 한성백제의 등장에서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자료집 발간 사업을 제안했으면 싶다. 아깝잖아? 그냥 발표문에만 써먹기엔? 

발표문이 추적한 식민지시대 한성백제와 관련한 움직임은 결국 조선총독부, 나아가 그 배후를 도사리는 식민모국 일본 제국의 문화재 정책과 긴밀히 연동하는데, 이 점을 두각해서 발표자가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 정책은 일본 제국의 문화재 정책 근간까지 흔들게 된다.

1915년은 그 점에서 획기인데, 그 이전 식민지 조선만 해도, 간단히 말해 세키노 다다시와 이마니시 류가 대표하는 도교 제국대학 출신들의 야전 시대는 저물고 저 시점을 고비로 제도로서 완연한 변화를 보게 된다. 이 중심에 놓인 인물이 구로이타 가쓰미다.

발표문을 보면 이 대목이 두드러지게 부각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발표자는 알고 있다. 식민지시대 문화재의 탄생과 전개는 구로이타 가쓰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사실을. 

오영찬 교수 발표는 개별로, 구체로 한성백제가 이런 과정들을 거쳐 탄생했다 아니다 하는 문제로 따질 사안이 아니라 본다.

발표자가 애써 발굴하고 정리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재 탄생을 이야기하는 거대 담론으로 한성백제를 끌어올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소 본질과는 벗어나는 이야기들로 토론을 갈음한다. 

 


 
이상은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가 100년 전 을축년 대홍수 발발에 즈음해 2025.7.17.(목) 10:00–17:00,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개최한 ‘물의 기억, 한강의 역사’ 학술대회의 오영찬 교수 발표 '일제시기 한성유적의 조사'에 대한 토론문이다. 

실제 토론은 언제나 그렇듯이 저 토론문과는 거의 관계없는 말들로 대체했다. 다만 공식 문건에서는 저 토론문이 남으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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