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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곡옥曲玉 만들어내던 틀을 출토한 전북 장수 마을유적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9. 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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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군에서 어제 돌린 고고학 발굴 성과 요약이라,

이르기를 천천–장수IC 연결도로 공사 구간 사전 조사에 포함된 계남면 화양리 10-1번지 일원 ‘장수 침곡리 유물산포지 G’ 구간에서 "금강 상류지방 최대규모 마한 취락지 발굴"을 이뤘다고 했거니와 

계속 말하지만 마한 운운은 택도 없는 소리라, 제낀다.

왜? 마한은 이미 온조왕 시대에 백제에 멸망한 까닭이라, 그럼에도 한국고대사학계나 고고학계가 계속 마한이 존속했다 계속 주장하는 이유는 백제에 병합되지 아니한 지역에서는 마한이 온존했다 믿는 까닭이다.

그 천부당만부당함을 계속 지적했으니 따로 말하지는 않기로 하거니와 
 

이른바 마한 취락 유적이라고. 취락? 이딴 말 계속 쓰야 하나? 마을이라 하면 되잖아!

 
암튼 저 지역 시굴 9,814㎡와 발굴 5,780㎡ 규모로 매장유산을 분포 여부를 조사한 결과,

저네들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원삼국시대 마한 취락으로 추정되는 주거지 63기, 지상건물지 10기, 구상유구 8기, 수혈 3기가 드러났으며, 장수 지역에서 확인된 마한 취락 가운데 최대 규모로 평가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이 유적은 현재 지형 변형이 심하지만, 취락이 운영되던 당시에는 현장에서 확인된 범위보다 훨씬 넓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거지는 (말각)방형계 평면이 주류를 이루고 일부 타원형도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점토식 부뚜막·주공·벽구·장타원형 수혈 등이 드러났고 장란형 토기, 심발, 시루, 호, 완, 주구토기와 더불어 소량의 철기류, 방추차, 곡옥거푸집 등이 출토됐다." 

"특히 집선문·승석문이 새겨진 회색 경질토기도 다수 발견돼 취락의 형성·운영 시기를 4~5세기로 추정하게 한다."

그러면서 조사단과 장수군은 "이 유적은 마한계 주거 구조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며,

전북 동부지역 마한계 주거지 연구와 장수 지역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면서

"또한 유적이 자리한 마무산 남동사면은 유천과 장계천이 합류해 금강으로 이어지는 수계의 핵심 위치로, 고대 교통·생산 거점지로서의 위상도 드러냈다"고 한다. 

고고학 전문용어라는 이름으로 난무하는 저 물귀신 같은 각종 용어는 일단 차치하자.

이번 발굴품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이 곡옥 거푸집이라는 물건이다.

곡옥 거푸집이란 무엇인가?

곡옥曲玉을 만들어내던 주물 틀이란 뜻이다.

곡옥이란 무엇인가? 순화 용어랍시고 굽은옥이라고도 하는 굼뱅이 모양 장식품이다.
 

 

이 정체를 아직 아무도 해명하지 못했는데, 저건 굼뱅이다.

굼뱅이 종류 중에서도 번데기다.

누에 번데기 말이다. 

저 모티브가 왜 생겼는가?

양잠 때문이다. 

 

곡옥 직접 모티브인 누에 번데기

 
이 문제는 매우 중대하므로 훗날 전론專論을 펴기로 하고, 암튼 저리 생긴 옥 종류를 곡옥이라 한다. 

한데 저 신라 곡옥들을 보면 저리 생겨먹은 돌을 가공한 듯하기도 하면서, 혹 일부는 유리 제품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한다. 

 

 

이번에 장수에서 발견됐다는 곡옥 거푸집이 바로 이것이다.

보다시피 토제품으로 만든 거푸집 맞고, 또 그 거푸집에 무엇인가 액체를 부어 만들어낸 것이 곡옥임은 저 생긴 모양을 볼 적에 틀림없다.

곡옥 거푸집은 말할 것도 없이 재료로 구분하면 오직 유리 제품(혹은 그에 버금하는 다른 주물 가능한 액체 연료)을 전제로 하지, 돌덩이를 갈아서 만들 적에는 저런 틀을 사용할 리가 없다. 

따라서 저 곡옥 주물틀은 말할 것도 없이 유리로 곡옥을 만들어낼 때만 해당한다. 

곡옥 성분 분석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과학과는 담을 쌓은 한국고고학이 해 봤자 몇 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런 곡옥 거푸집이 내 친구 이영덕 원장에 의하면 광주 선암동 유적에서도 나온 적 있다 한다.

그래서 이쪽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사진이 뜬다. 
 

 
이 유리 거푸집을 보면 곡옥 틀은 안 보인다.

혹 영덕씨가 착각했을까?

그것을 짚기 전에 유의할 점은 저와 거의 똑같은 유리 거푸집이 실은 서울 풍납토성 경당지구 출토품에도 있다! 

야 곡옥이 안 보인다야? 하는 반문에 영덕씨가 구체하는 자료를 찾아 보강한다. 
 

 
이 두 장 중 위 사진 오른쪽 하단에 보면 뚜렷이 곡옥 틀이 보인다. 

암튼 이를 보면 이 당시에 이미 곡옥 만이 아니라 대롱 옥인 관옥管玉, 고리형 옥인 환옥環玉까지 다 만들었음을 본다. 

저들 유리 거푸집은 놀랍게도 주거지 부뚜막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건 혹 영덕씨 착시일 수도 있겠는데, 주거지 부뚜막이 아니라 대장간 부뚜막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 본다. 

더욱 유의할 점은 저 광주 유적은 영산강 변 모래사장에서 발견됐다 한다. 

유리 주재료 규암인가를 당연히 모래에서 구했을 테니,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우리 조상님들은 그 제작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고, 이런 기술을 토대로 다종다양한 유리 제품을 생산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한다. 

동위원소 분석 결과 한국 출토 유리가 태국산? 베트남산? 동남아산?

심히 그 근간을 흔든다. 

나 역시 개중 일부 외국산 수입제품, 특히 이른바 로만글라스로 대표하는 수입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거니와 요새 유리 제품만 나왔다 하면 동남아 타령 일삼는 일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저런 명명백백한 자체 생산 시스템을 보고선 더욱 삼가야지 않겠는가?

실크로드 타령 다 좋으나 증거는 빼도박도 못해야 한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유리거푸집은 아래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decTLgLnj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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