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무영전본과 사고전서본 by 김영문
* 청대에 이르러 중국 고적의 방각본과 복각본이 쏟아져 나오자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명나라 때 건립한 무영전(武英殿)이라는 전각 안에 ‘무영전서국(武英殿書局)’을 설립하여
황실의 장서를 소장하고, 교감하고, 연구하고, 정리하고, 다시 판각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이곳에서는 강희 40년(1701년) 이후 정교하고 미려한 동판 활자와 특별 제작한 개화지(開化紙)를 이용하여 다양한 중국 고적을 고품질로 인쇄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음 시대인 건륭(乾隆) 4년(1739년)에서 건륭 49년(1784년)까지 ‘흠정이십사사(欽定二十四史)’를 간행했는데,
이 속에 건륭 4년에 교감하여 간행한 『삼국지』 14책 65권이 편입되었다.
이 판본을 ‘무영전본’ 또는 줄여서 ‘전본(殿本)’ 『삼국지』라고 하며, 청대에 간행된 『삼국지』 판본을 대표한다.
이 판본은 이후 형식, 내용, 편집 방식이 건륭 45년(1780년)에 간행된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삼국지』에 그대로 이어졌다.
* 이 판본의 저본은 명대 남감본과 북감본으로 이어지는 판본으로 보이며,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저본 이외에도 북송본(北宋本), 남송본, 원본(元本), 모본(毛本) 등 다양한 『삼국지』 판본을 비교하고 교정하여 「교감기(校勘記)」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교감기」를 각 권 뒤에 부기(附記)함으로써 이 판본의 정확성과 신빙성을 높였다.
이런 편집은 『삼국지』에 관한 한 이 무영전본에서 처음 시도된 독특한 방식이다.
또 각 권 앞부분에 그 본기나 열전에 속하는 인물의 성명을 모두 표기한 것도 이전 판본에는 없는 방식이며,
이로써 목록뿐 아니라 각 권 앞부분을 통해서도 그 본기나 열전에 어떤 인물이 편입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각 권 1행 오른쪽 상단에 삼국 각 역사의 부분 명칭을 「위지」, 「촉지」, 「오지」로 표기한 점과 그것을 모든 쪽의 판심 어미 아래에도 표기한 점, 그리고 모든 쪽의 어미 위 공간에 ‘건륭 4년 교간(乾隆四年校刊)’이라고 명기한 점,
아울러 진수의 원문을 모두 큰 글자로 21자가 들어가도록 편집하고, ‘배송지 주’를 1행에 작은 글자로 두 줄을 넣어 모두 42자가 들어가도록 편집한 점은 명대 북감본을 그대로 계승한 양식이다.
*조금 뒤에 나온 ‘사고전서본’은 이 무영전본의 명조체 서체를 서예의 필획 특징을 살린 미려한 해서체(楷書體)로 바꾸고 책수만 24책으로 늘렸을 뿐 내용과 양식은 거의 동일하다.
이 번역본에서 사고전서본을 저본으로 삼은 이유는 이 판본이 정교한 교감을 거친 『삼국지』의 최종본이고 각 권 뒤에 붙어 있는 「교감기」를 참고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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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배송지 주 완역 출간을 코앞에 둔 김영문 선생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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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 급고각본 by 김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