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소행으로 몰아간 2000년 일본 구석기 날조 사건

이제 이 일도 당대를 경험하지 못한 이가 많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거니와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고고학 치욕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旧石器捏造事件[구석기날조사건]이라 흔히 표현하며, 영어로는 Japanese Paleolithic hoax라는 식으로 표현하거니와
그에 대해서는 위피피디아 일본어 항목 旧石器捏造事件(きゅうせっきねつぞうじけん)으로 잘 정리되어 있거니와, 이를 전문 옮기는 일로 그 일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일본 전기·중기 구석기시대 유물(석기)이나 유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이러한 발굴조사에 종사하고 있던 아마추어 고고학 연구가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사전에 매설해둔 석기를 스스로 파냄으로써 발견한 것처럼 보이게 한 자작극으로 들통나고 그 일이 2000년(헤이세이 12년) 11월에 마이니치신문 특종보도를 통해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인용자 주. 항용 이 책임을 회피하고자 일본 고고학에서는, 심지어 저를 바라보는 한국고고학 또한 저런 망발을 일삼거니와, 이 사건을 주도한 이가 아마추어 고고학도라 한다.
아마추어 고고학도 아닌 전문 고고학도는 저런 일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까는 저런 규정은 망발이다. 아마추어 고고학도 있음 나와 보라 그래!)
조작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태를 심각하게 본 일본 고고학 협회는 후지무라를 탈퇴 처분했다. (인용자 주. 후지무라가 아마추어라며? 탈퇴는 뭐야 그럼?)

개요
후지무라는 1970년대 중반부터 각지의 유적에서 「구석기 발견」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석기를 사전에 묻는 모습을 2000년(헤이세이 12년) 11월 5일자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조간이 특종 보도하면서 부정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구석기 시대 연구에 의문이 생겨 중학교·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물론 대학 입시에도 영향을 미친 일본 고고학계 최대 불상사가 되고 일본 밖에서도 보도되었다.
화산재층의 연대에만 의존하기 쉬운 점 등 구석기 연구의 과학적 방법에 의한 검증 미숙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인용자주...과학을 멀리하기는 한국이나 일본 고고학 모두 마찬가지였다.)
또한 조몬시대 이후에는 명확한 유구가 지하를 굴착하여 만들어졌으므로 흙의 성격에서 곧바로 진위를 판단할 수 있어 조작이 불가능하다.
(인용자주...웃기는 소리, 속이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신념에 의한 조작은 부지기로 일어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일을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경위
2000년 11월 발각 당시 후지무라는 민간연구단체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東北旧石器文化研究所' 부이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조작을 개시한 것은 1970년대 중반, 1975년에 결성된 미야기현 구석기연구그룹 '석기문화담화회石器文化談話会'에 아마추어 고고학 애호가로서 접근했을 때부터였다.
(인용자주...예서도 아마추어를 강조한다. 왜? 그래야 프로페셔널인 지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이 모임은 일본 전기 구석기의 존재 가능성을 전부터 주장한 세리자와 조스케芹沢長介 도호쿠대 교수 문하생 오카무라 미치오岡村道雄를 리더로 한 고고학자들과 후지무라 같은 재야 고고학자, 학생들로 구성된 발굴조사팀이었다.

그는 조작 발각까지의 약 25년간, 주위의 연구자가 기대하는 것 같은 석기를, 기대되는 오래된 연대의 토층(롬층ローム層)으로부터 차례차례로 파내어 보여, 그것에 의해서 그룹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평가되어 후에 「신의 손神の手」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그러한 「고고학적 대발견」을 마을 부흥이나 관광으로 연결시키고 싶은 현지 관계자로부터도 환영받았다.
그러나 '발견'된 유물의 90%는 그 자신의 손에 의해 표면 채집되거나 발굴된 것이며, 타인의 손에 의해 발굴된 것은 그가 미리 들여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파내어 보여주거나 묻혀 있던 석기들은 자신이 사전에 다른 유적 답사를 하여 모은 조몬시대 석기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 유적들은 동북지방 어딘가일 것이지만, 완전히 추적되어 밝혀내지는 못했다.
조작된 [가짜 유적]은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일부 홋카이도와 남관동에까지 미치고 있다.

또한 후지무라가 관여한 유적 대부분에서 발굴조사보고서가 제출되지 않은 것이나 보고서의 내용이 불충분한 것도 발각되었다.
마이니치 신문 특종에서 지적된 것은, 미야기현宮城県 카미타카모리 유적上高森遺跡 및 홋카이도 총진 후도사카 유적総進不動坂遺跡이었지만, 그가 관련된 모든 유적에 대해 재점검이 실시되어, 그가 관련된 「석기」대부분에 발굴 당시의 「가즈리がじり」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처나 여러 회에 걸쳐 철鉄과 찱과擦過한 흔적인 「철선상흔鉄線状痕」등이 인정되었다.
또한 일부 유적에 대한 재발굴이 이루어져 남아있던 조작석기가 발견됨에 따라 조작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카미타카모리 유적을 비롯하여 마장단 A유적馬場壇A遺跡·타카모리 유적高森遺跡 등 많은 유적이 구석기시대 매장문화재 포장지(유적)로 인정·등록이 취소되었다(카미타카모리 유적은 매장지 등록 자체를 말소, 타카모리 유적 등은 다른 시대 매장지로 변경).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좌산란목 유적座散乱木遺跡은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다.
「동북 구석기 문화 연구소」는 민간 연구 단체로서 1992년에 설립되어, 2000년 8월 24일에 미야기현 지사로부터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으로서 인증되었다(이사장 카마타 토시아키鎌田俊昭<임제종臨済宗 묘신사파妙心寺派 不磷寺 15대 4세 주지, 학교법인 不磷寺 학원 이사장·하치만 하나조노 유치원八幡花園幼稚園 원장>).

동 연구소는 카마타·후지무라 등의 「석기 문화 담화회」가 설립한 법인 조직으로, 담화회·연구소 모두 후지무라 등의 활동 거점이었다.
사건 발각 후, 후지무라는 조직을 떠났지만, 후지무라의 기자 회견에도 동석한 이사장 카마타 토시아키와 지도자 카지와라 히로시梶原洋(세리자와 조스케 토호쿠 대학 교수의 문하생. 도호쿠 복지대학 교육학부 교육학과 교수)는 2002년 일본 고고학 협회편 「전·중기 구석기 문제 조사 연구 특별 위원회 보고(II)」(2002년 5월)의 제VI부 「구석기 조작을 왜 놓쳤는가」 제1장(173~185쪽)에서 연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북구석기문화연구소는 당분간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방법으로 굳이 제대로 된 조직의 특정 비영리활동법인 그대로 각종 검증에 전적으로 협력하고 미간행된 5개 유적의 보고서를 신속하게 작성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책임의 분산이나 원망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분명히 하고 그 반성 위에 서서 이 사건으로 인해 잃어버린 고고학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일본 구석기 연구의 재구축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 석기문화담화회, 동북구석기문화연구소와 이어진 연구의 부채를 꼭 많은 분들의 협조로 털어내고 싶은 것이 우리에게 지금 부과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동북구석기문화연구소 명의로『가미타카모리유적발굴조사보고서上高森遺跡発掘調査報告書:미야기현 츠쿠다테쵸宮城県築館町』(2002년 5월),『소데하라3유적袖原3遺跡·나카지마산유적中島山遺跡·이치토우치마츠바야마유적발굴조사보고서一斗内松葉山遺跡発掘調査報告書』(2003년 3월),『표주박혈유적발굴조사보고서ひょうたん穴遺跡発掘調査報告書:이와테현 이와이즈미쵸岩手県岩泉町』(2003년 12월)를 발간했으니, 2003년 12월에 보고서 간행을 마치면서 이듬해인 2004년 1월에는 석기문화담화회·도호쿠구석기문화연구소가 함께 해산했다.
본 사건을 취재한 마이니치 신문 취재반은 2001년, 제49회 키쿠치 칸상菊池寛賞을 수상했다.
영향
일본열도의 「전·중기 구석기」연구는, 그러한 옛 시대의 석기는 일본에는 없을 것이라는 비판을 당초에는 받고 있었지만, 후지무라의 발굴 성과에 의해 강력한 뒷받침을 얻어, 1980년대 초에는 확립되었다고 선언되어, 조작 발각 전에는 일본 구석기시대의 시작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류에 들어가는 70만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조작발각으로 후지무라 성과를 바탕으로 인정받고 있던 일본의 전·중기 구석기 유적의 전부인 162유적이 유적유물의 인정이 취소되고, 동북 구석기문화연구소는 '학설의 근간이 무너졌다'며 해산에 이르렀다.
게다가 조작 유적이 학회에서 말소될 뿐만 아니라 일본사 검정필 교과서 석기에 관한 기술조차 지워지게 되었다.
또 중국, 한국, 북한 등 역사교과서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는 나라들은 국내 언론에서 이 사건을 "일본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 증명됐다" "한 연구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인의 역사인식 자체에 원인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또 후지무라의 조작 발각 이듬해인 2001년 주간 분슌文春이 오이타현大分県의 성악동혈聖嶽洞穴에 대해서도 조작 혐의가 있다고 세 차례 보도했고, 이 여파로 발굴 책임자였던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가 분슌에게 항의 자살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원인
오다 시즈오小田静夫, 다케오카 토시키竹岡俊樹 등 고고학자들이 일찍부터 후지무라의 '발견'에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장기간 오류가 통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일본고고학협회는 사건 발각 후인 2001년 6월 '전·중기 구석기 문제 조사 연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사건 조사에 임해 조작을 단정하고 있다.
2003년 5월에는 후지무라가 관여하는 유적 총 170개소, 석기자료 3,500점의 검증보고서가 간행되어, 「전·중기 구석기 유적」은 소멸되었다.
냉정하게 그들의 「석기」나 출토 상황을 관찰해 보면, 화쇄류 속에서 출토되는 등, 이해할 수 없고 부자연스러운 유물이나 유적이었다는 것이 명확했지만, 본 연구 그룹은 편리한 해석을 함으로써 그것들의 사실을 계속 무시했다.
그 중에는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의 절단면이 우연히 일치했다는 믿기 어려운 발견도 있었다.
발굴성과가 나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도, 후지무라 도착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에는 「대발견」이 있는 것이나, 「대발견」이 골든위크 중에 집중되어 있는 것, 「대발견」이 후지무라가 있을 때에 집중되어 있던 것 등 부자연스러운 점은 오카무라 미치오도 의심하고 있었다.

또 현장에서 발굴 작업하는 고고학 애호가 일부한테서도 '대발견'에 의심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일개 아마추어가 증거나 확증도 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꺼려지는 상황(헬로 효과)이 되어 있어 반증·반박을 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이는 후에 발굴 작업에 참가하고 있던 카쿠하리 준이치角張淳一(당시 유물 정리·도화·분석 회사 아르카 대표)가 타케오카 토시키(竹岡俊樹)에게 제시한 견해이다.
일본국 정부도 관련 유적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석기를 문화청 주최 특별전에 전시하는 등 주위에 이들 연구를 무비판적으로 환영하고 뒷받침하는 존재가 많이 있었던 것은 사건을 조장하고 방조시키는 역할이 매우 컸다.
특히 문부성에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에 대해 보고서도 나오지 않은 유적이 왜 교과서에 실리느냐며 비판이 집중됐다.
본래 인류의 보편적 가치유산으로 취급되어야 할 역사적 사물에 대해, 그 대부분이 관광자원의 관점에 치우치는 형태로 지역주민에게 인식되어 상업적인 효과를 우선시하도록 취급되어 온 실태가, 이번 사건 발각에 의해 밝혀졌다.
「전·중기 구석기」 연구가 활발했던 당시에는 비판이 어려웠으며, 1986년의 오다 시즈오, 찰스·T·키리에 의한 비판 논문 이후, 다시 반론이 개시되는 것은 1998년의 타케오카 토시키의 논문 1점, 및 2000년 발각 전의 카쿠하리 준이치와 타케하나 카즈하루의 2명에 한정된다.
고고학계는 조작 발각 이전 25년간 조작을 비판한 학자나 연구자를 배척하거나 압력을 가함으로써 사실상 학회 팔분으로 만들어 조작 비판의 목소리가 분출되는 기운을 눌렀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도쿄도 교육청 오다 시즈오(와 키리)등이 과학적 근거가 의심스럽고, 경석의 강하나 수해가 잇따르는 토지에 연면으로 이주한 요인이 불명하며, 발굴된 석기의 대부분은 수평으로 매설하고 있는 데다가 단품으로 출토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1998년 이후의 비판의 요점은 문제의 석기자료군이 본래 있어야 할 전기나 중기의 석기로서 '이상하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정당한 비판은, 2000년 11월 5일의 마이니치 신문에 의한 특종까지, 학계로서 생략되는 것은 없었다.
또한 일본고고학협회 전·중기 구석기문제조사특별위원회 최종보고 후에 후지무라의 조작범위는 구석기시대를 넘어 조몬시대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후대학 다나카 가쓰오田中嘉津夫 명예교수도, 본 사건을 「석기의 과학적인 연대 동정은 묻혀 있던 토층의 연대 측정에 의할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수법의 약점을 찌른 것으로 본다.
그 후
조작사건으로 인류가 일본열도에 도달한 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3만8000년 전쯤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작과 관계없는 구석기시대 유적 조사는 사건 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석기가 발견되는 등의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参考資料:藤村新一が発掘・発見に関与した遺跡と主な調査成果
1975 石器文化談話会設立
1976 宮城県岩出山町座散乱木遺跡第1次発掘調査(石器文化談話会)
1978 宮城県小野田町鹿原D遺跡発掘調査(小野田町教委)
1979 座散乱木遺跡第2次発掘調査(石器文化談話会)
1980 座散乱木遺跡の露頭で赤色風化層から石器断面採取
1980 宮城県仙台市山田上ノ台遺跡発掘調査(仙台市教委)・約5‐6万年前
1981 宮城県仙台市北前遺跡発掘調査(仙台市教委)・5‐6万年前
1981 座散乱木遺跡第3次発掘調査(石器文化談話会)・4万年前
1983 宮城県大和町中峯C遺跡発掘調査(宮城県教委)・30万年前
1983 宮城県多賀城市志引遺跡発掘調査(多賀城市教委)・4‐5万年前
1984 宮城県仙台市青葉山B遺跡発掘調査(東北大学)・18万年前
1984 宮城県古川市馬場壇A遺跡第1次発掘調査(石器文化談話会)
1984 馬場壇A遺跡第2次発掘調査(東北歴史資料館)・20万年前
1985 宮城県仙台市住吉遺跡発掘調査(仙台市教委)
1985 馬場壇A遺跡第3次発掘調査(東北歴史資料館)・13万年前:炉跡発見
1986 馬場壇A遺跡第4次発掘調査(東北歴史資料館)・13万年前:ナウマン象とオオツノジカの脂肪酸検出
1987 宮城県仙台市富沢遺跡発掘調査・2万年前:埋没林と生活跡
1987 馬場壇A遺跡第5次発掘調査(東北歴史資料館)
1987 宮城県多賀城市柏木遺跡発掘調査(多賀城市教委)・4‐5万年前
1987 東京都稲城市多摩ニュータウンNo.471-B遺跡(東京都埋文)・5万年前
1988 馬場壇A遺跡第6次発掘調査(東北歴史資料館)・5‐7万年前:遺構
1988 宮城県築館町高森遺跡第1次発掘調査(石器文化談話会)・20万年前
1989 福島県東村上野出島遺跡の露頭で鹿沼パミス下位から石器断面採取・4万年前
1989 宮城県色麻町大原B遺跡第1次発掘調査(宮城県教委)
1990 宮城県色麻町大原B遺跡第2次発掘調査(宮城県教委)
1990 宮城県村田町小泉東山遺跡発掘調査(村田町教委)・9‐10万年前
1990 福島県西郷村大平遺跡第1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4.5万‐5万年前
1991 高森遺跡第2次発掘調査(宮城県教委)・国内最古の公算大
1991 大平遺跡第2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4.5万‐5万年前
1992 高森遺跡第3次発掘調査(宮城県教委)・50万年前
1992 福島県福島市竹の森遺跡第1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6‐9万年前
1992 群馬県大間々町桐原遺跡(桐原遺跡調査会)・3‐4万年前
1992 東北旧石器文化研究所設立
1992 宮城県築館町上高森遺跡の露頭から石器断面採取
1992 山形県尾花沢市袖原3遺跡の露頭から石器断面採取
1993 上高森遺跡第1次発掘調査(上高森遺跡調査団)・40万年前
1993 袖原3遺跡第1次発掘調査(袖原3遺跡発掘調査団)・10万年前
1993 竹の森遺跡第2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11‐13万年前
1994 上高森遺跡第2次発掘調査(上高森遺跡調査団)・50万年以上前:石器一括埋納遺構1
1994 高森遺跡第4次発掘調査(宮城県教委)・50数万年前
1994 袖原3遺跡第2次発掘調査(袖原3遺跡発掘調査団)・35万年前
1994 山形県新庄市山屋A遺跡の赤色風化層の露頭で石器断面採取・10‐15万年前
1995 宮城県色麻町中島山遺跡の露頭で赤色風化層上面から石器断面採取
1995 上高森遺跡第3次発掘調査(上高森遺跡調査団)・60万年前:石器一括埋納遺構2,3
1995 岩手県岩泉町ひょうたん穴遺跡第1次発掘調査(ひょうたん穴遺跡調査団)・4‐5万年前:石器と獣骨
1995 福島県二本松市原セ笠張遺跡第1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20‐30万年前
1996 宮城県仙台市青葉山E遺跡発掘調査(東北大学)・3‐8万年前
1996 ひょうたん穴遺跡第2次発掘調査(ひょうたん穴遺跡調査団)・5万年前:貝殻
1996 袖原3遺跡第3次発掘調査(袖原3遺跡発掘調査団)・35万年前
1996 原セ笠張遺跡第2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40‐60万年前
1997 ひょうたん穴遺跡第3次発掘調査(ひょうたん穴遺跡調査団)・国内最古の洞穴遺跡
1997 袖原3遺跡第4次発掘調査(袖原3遺跡発掘調査団)・40‐50万年前:大型クリーバー
1997 原セ笠張遺跡第3次発掘調査(郡山女子大学)・40‐60万年前
1997 中島山遺跡で断面採取された剥片が袖原3遺跡第4次発掘調査で断面採取されたスクレイパーと接合
1997 座散乱木遺跡を国の史跡に指定
1998 上高森遺跡第4次発掘調査(上高森遺跡調査団)・60万年前:石器一括埋納遺構4、60数万年前:接合資料
1998 中島山遺跡第1次発掘調査・10万年前:1997年発見の接合資料にさらに接合する石核、石器一括埋納遺構1
1998 北海道新十津川町総進不動坂遺跡の露頭から石器断面採取
1998 総進不動坂遺跡第1次発掘調査(札幌国際大学)・5万年前
1998 ひょうたん穴遺跡第4次発掘調査(ひょうたん穴遺跡調査団)・4‐5万年前:遺構
1999 中島山遺跡第2次発掘調査・10万年前:小型柳葉形尖頭器、石器一括埋納遺構2
1999 上高森遺跡第5次発掘調査(上高森遺跡調査団)・60万年前:石器一括埋納遺構5、60数万年前の3m下層
1999 総進不動坂遺跡第2次発掘調査(札幌国際大学)・20‐30万年前
1999 ひょうたん穴遺跡第5次発掘調査(ひょうたん穴遺跡調査団)・10万年前:石器と獣骨
1999 袖原3遺跡第5次発掘調査(袖原3遺跡発掘調査団)・袖原6遺跡の露頭で石器断面採取
1999 福島県二本松市箕輪宮坂遺跡発掘調査(東北大学)・13万年前
1999 福島県安達町一斗内松葉山遺跡の露頭で上宝テフラの下層から石器断面採取
2000 埼玉県秩父市小鹿坂遺跡第1次発掘調査(埼玉県埋文調査事業団)・50万年前:生活遺構
2000 一斗内松葉山遺跡発掘調査(一斗内松葉山遺跡調査団)・78万年前を遡る可能性
2000 ひょうたん穴遺跡第6次発掘調査(ひょうたん穴遺跡調査団)・10万年前:石器、円礫、獣骨
2000 埼玉県秩父市長尾根遺跡発掘調査(埼玉県埋文調査事業団)・35万年前:遺構群
2000 埼玉県秩父市長尾根南遺跡発掘調査(埼玉県埋文調査事業団)・30万年前
2000 埼玉県秩父市長尾根北遺跡発掘調査(埼玉県埋文調査事業団)・45万年前
2000 埼玉県小鹿坂遺跡第2次発掘調査(埼玉県埋文調査事業団)・50万年前
2000 山形県新庄市上ミ野A遺跡発掘調査(東北大学)
2000 総進不動坂遺跡第3次発掘調査(札幌国際大学)・20‐30万年前
2000 上高森遺跡第6次発掘調査(上高森遺跡調査団)・60万年前:遺構群・78万年前を遡る可能性
2000 群馬県沼田市下川田入沢遺跡発掘調査(下川田入沢遺跡調査団)
2000 毎日新聞報道、上高森遺跡第6次、総進不動坂遺跡第3次発掘調査での捏造発覚。
2000 第14回東北日本の旧石器文化を語る会・前・中期旧石器の検討
2001 文部省科研費特定領域研究「日本人および日本文化の起源に関する学際的研究」考古学班
・シンポジウム:前期旧石器問題を考える
2001 一斗内松葉山遺跡発掘調査(安達町教委)・石器出土なし、捏造痕跡確認
2001 宮城県考古学会・旧石器発掘ねつ造問題特別委発足
2001 日本考古学協会第67回総会・前・中期旧石器問題調査研究特別委発足
2001 袖原3遺跡第6次発掘調査(尾花沢市教委)・石器3点(捏造痕跡)確認
2001 総進不動坂遺跡検証発掘調査(札幌国際大学)・石器1点(捏造痕跡?)確認
2001 上高森遺跡検証発掘調査(上高森遺跡検証発掘調査団)・石器3点(捏造痕跡)確認
2002 座散乱木遺跡発掘調査(座散乱木遺跡発掘調査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