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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근대건축을 개척한 고 손장원 인천시립박물관장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2. 3.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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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손장원 인천시립박물관장

 
지금 다른 기사들 보다가 우연히 손장원 인천시립박물관장이 며칠 전인 지난달 30일 향년 62세,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남다르다 할 만한 인연은 없다.

다만 선생이 인천 지역 문화계 상징성이 있는 있는 인물이요, 현직이 현직이니만큼

주로 인천 송도에 뿌리를 내린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관련 회의가 있을 때마다 서너 번 뵈었고,

또 그때 잠시나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인연이 있다. 

덧붙여 고인은 인천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 모 문화계 인사와 아주 가깝고, 나아가 그와 내가 아주 가깝기에

언제인가는 인천에서 셋이 한 번 모이자 전화 통화를 하고선 어영부영하다가 넘기고 말았다.

작년 언제인가?

내가 인천시립박물관을 부러 탐문하러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국박물관 문제, 특히 공립박물관 역사를 한창 정리하는 작업에 열중 중이었으니,

그 일환으로 인천시립박물관을 넘길 수는 없었다.

왜? 그 연원이 아주 깊어 국립박물관 역사와 거의 궤를 같이하며 당연히 공립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인 까닭이었다.

이 인천시립박물관은 서너 번 찾기는 했지만, 이때는 방문 목적이 아주 뚜렷해서 주로 그 역사 연원을 찾자는 취지였으니,

그날이 평일이었는데, 대략 일을 끝내고선 학예실에 들러 기초 자료를 얻고선 혹 관장님 계시냐 여쭈었더니 출타 중이라 해서 역시 만남이 불발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왔다간다는 기별은 전화로 넣었으니, 그것이 짧지만 마지막인 인사가 되고 말았다.

저 사진대로 고인은 참 선하게 생긴 사람이다.

해 맑았고 언제나 웃는 얼굴이 사람이 어찌하면 저런 표정을 매번 할 수가 있는지 부럽기도 했다. 

깊이 알지는 못하기에 고인 성정까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참 좋은 분인 듯했고, 주변에서도 그리들 다 이야기했다. 

한데 내가 알기 시작했을 때 그때도 이미 고인은 병마와 투쟁 중이었다.

항암 치료를 계속한다는 말을 들었고, 하도 웃는 얼굴만 하고 만났기에 잘 이겨내실 줄 알았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예순둘이면 나한테는 진짜로 편한 형님이 되었을 테다. 

그 짧은 만남들에서 시립박물관장으로 고인은 고민이 참 많았다.

무엇보다 명색이 광역자치단체 대표 공립박물관장으로서 그 초라한 박물관 처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선, 병마와 싸우는 고인을 향해서 인천시와 싸워야 한다, 가만 있으면 주는 법 없다. 우는 아이 젓 먹는 법이다고 요구했으니,

지금 생각하니 내가 혹여 고인께 명줄을 당기는 일을 하지 않았나 하는 송구함도 있다. 

그는 내력을 보면 충남 당진 출신이라 하는데, 뱃길 때문인지 인천에는 당진 출신이 많다.

아마 그의 집안도 이런 내력으로 인천으로 터전을 옮기지 않았나 싶다.

인천 옆동네 부천에서 부천공고를 나오고, 인하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가면서 근대건축을 전공하는 본격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가 착목한 것은 특히 근대기 엽서와 사진이었다.

이런 자료들을 눈여겨 봤으니, 이 분야가 최근 각광받거니와 그 선구적인 위치에 선 사람 중 한 분이라 할 만하다. 

그는 90년대 초반 5년간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였다.

이후 신성대 교수를 거쳐 인천재능대로 자리를 옮겼으며, 작년 6월 친정이라 할 만한 시립박물관에 관장으로 부임했다. 

인천근대건축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아까운 인재가 한창 일할 나이에 갔으니 하늘도 무심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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