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일본 동경에는 고라쿠엔後楽園이라는 곳이 있다.
여기는 지금 무슨 경기장인지 체육관인지가들어서서 거기에 이름 붙어 우리에게 유명하지만
여기는 원래 에도시대 무슨 영주의 정원이었다.
그 정원의 이름이 고라쿠엔인데,
유명한 북송의 대 유학자,
존경해 마지않은 범중엄 선생의 일갈,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에서 따온 것이다.
에도시대 무사들 입에서 후락원後楽園이라는 말이 나오는거 자체가
이미 이 시대 일본 무사란 더이상 전국시대 칼잡이 무사가 아니며
이데올로기를 장착한 지사로 진화했다는 거을 의미한다.
한국의 19세기 향촌사회.
그 혼란과 에너지의 멜팅 폿에서
불과 몇 년 후면 진주민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서
묵묵히 자기 땅에서 노비 수백명을 1860년대까지도 사역시키던 소위 양반들은,
과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했을까.
그게 아니면 가진 것도 쥐뿔도 없는데
출세 한 번 해보겠다고 과거를 계속 죽도록 보다가
그 과거도 훌러덩 없어지니
이번에는 독립협회 일도 하고,
동학에도 개입했다가
나라가 없어지니 그대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그게 아니면 출세해보려고 계속 공부하고 노력한
19세기 말의 정체 불명의 젊은이들이 더 범중엄에 가까울까.
범중엄이 19세기 말에 부활했다면
틀림없이 메이지유신의 젊은 지사들,
하층 계급의 무사들과
조선에서는 빽도 없이 악착같이 유학호를 달고 자충우돌 준동한 젊은 사람들.
이 위에 강림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 19세기의 이 "향촌중인"들. 가짜양반들, 유학모칭자들이야말로
현대한국의 사실상 조상격에 해당하는 바,
이들에 대한 좀 더 본격적인 연구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