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노비해방과 그에서도 살아남은 노비제

우리나라 공노비 해방은 1800년 순조 원년이지만
노비제도 자체의 폐지는 갑오경장인가 그러니 구한말인 셈이다.
그런데 노비는 갑오경장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그 증거로 곰씹어 볼 만한 내용이 바로,
몇몇 집안의 이야기에 따라 나오는,
20세기 초반에 집안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키는 시키는 스토리이다.
이 스토리가 자못 황당하여
갑오경장에 노비제는 폐지이니 당연히 집에 있는 노비는
주인이 풀어주건 말건 할 것 없이 노비는 해방이 이미 되었을 터인데
무슨 해방을 주인이 또 해준다는 말인가?
이 19세기 말의 노비의 실상을
당시의 호적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우리나라는 이 당시 집집마다 소농민화가 격렬히 진행되어
한 집당 호주와 와이프, 그리고 자녀로 구성된 가구가 이전과는 달리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노비는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이 때가 바로 집집마다 양반을 칭한다는 모칭유학의 전성시대가 되겠다.
그런데 이 시기조차도
전통적으로 노비를 200-300명씩 거느리고 있던 대지주이자 양반들 중에는
마지막까지 노비를 20-50명 정도 유지하면서 버티는 집들이 꽤 있었다.
아마도 집안의 땅을 소작 주지 않고 경작하기 위해 노비 사역을 고수하는 집들이었을 텐데
이런 집이 개항에 인접한 시기의 호적에서도 상당히 보인다.
이런 집들은 당연히 엄청 넓은 농경지를 보유하였고,
노비 숫자도 꽤 있는 집이었지만,
19세기 말 이런 집이 이전시기에 비해 많지는 않았다.
이 시기가 되면 이미 노비 사역은 농업생산의 주요한 방식이 아니고
지주 전호제, 즉 소작 병작 반수제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느닷없이 보이는
"엄청나게 많은 토지를 가지고 노비도 많았는데,
이를 다 해방시키고 나섰다"는 집안의 사정은 사실
19세기 말까지도 노비사역을 풀지 않고 마지막까지 유지하고 있던 양반집인 셈이다.
이들이 노비를 다 해방시킨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대로 지배층으로 남아 있었을까?
21세기의 지금 모습을 보면 이들 중에는 몰락한 집안도 많았을 것이고
성공적으로 다음 세대로 지배자의 위치를 넘겨준 이들도 있겠지만,
그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