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김단장께서 포스팅 한 준호구

신동훈 識 2025. 8. 3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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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포스팅에 김단장께서 자료 사진을 하나 붙여두신 바 

이 자료에 대해 필자 나름의 해설을 좀 해본다. 

조선시대에 준호구는 호적을 기본으로 뗀 요즘으로 치면 호적등본 같은 것인데, 

대개 과거 시험 보러 갈 때들 많이 뗐다고 들었다. 

이 준호구는 광서 8년에 발급된 것이니 1882년이다. 

이 해에 임오군란이 있었다. 

이 준호구를 발급받은 분이 과거를 보러 이것을 뗸 것이 맞다면 

청운의 뜻을 품고 올라갔을 터. 

이 분의 직역은 이 자료를 보면 유학이다. 

양반이라는 뜻이다. 

준호구에 부인의 성 아래에는 "씨"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호적에 "씨"는 아무나 붙이지 않고 양반의 부인에게만 "씨"를 붙인다. 

호적에서 중인의 부인은 "성", 평민의 부인에게는 "소사 (혹은 조이)"로 붙이므로 이 준호구를 보면 이 분은 양반 호적이다. 

그런데-. 

준호구에는 호적에 적혀 있는 본인의 친가 3대조, 그리고 외조부, 

처가 3대조와 외조부를 적게 되어 있는 바-. 

이 여덟분의 조상 (친가 3대조와 외조, 처가 3대조와 외조) 

모두가 "학생"으로 되어 있다. 

바로 ":살아서는 유학 죽어서는 학생"이라 할 때 바로 그 "학생"이니, 

이 분은 친가 처가 3대조에 외가까지 벼슬을 한 분이 한 명도 없었던 셈이다. 

그러니 직역을 학생으로 적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3대가 벼슬을 하지 않은 집에 해당하지만

호적상으로는 여전히 "양반"으로 분류됨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서도 19세기 들어가면

이런 양반들 과거 시험 많이 쳤고 

급제자도 꽤 나왔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제대로 된 양반이 거의 없다고 일컬어지던

평안도 지역 문과 급제자 수가 

전통의 강호 경상도보다 더 많다. 

그들 모두는 아마 이와 비슷한 준호구, 

친가 처가 3대조에 외조까지 몽땅 학생이라는 준호구를 들고 과거를 보러 갔을 테고

그 중에 일부는 급제해서 출신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양반이 정의와 그 구성이 19세기 중후반 넘어서면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고, 

오늘날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바 

우리 집이 원래 양반 집안이라는 의식은

대개 바로 이 19세기 말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21세기 현재 한국인들한테 물어보면

자기 집이 양반 집 아닌 집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년만 올라가면 우리나라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나라였다. 

얼마나 한국의 변화가 극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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