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

낙방한 시험지는 아무나 보는 조선시대, 폐지 혹은 이면지 활용

日莫途遠 2026. 8. 16.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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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옥계에서 향시나 이런 시험이 있었는지, 그곳 동몽童蒙 이순승李舜承이 제출한 양지론量地論 논설 답안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동몽이 무슨 토지 측량론을? 한심한 집구석이다.

 

조선시대는 종이가 귀한 시대다. 

필자가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필자 어렸을 때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재생지인 갱지를 한 장에 얼마, 이렇게 계산해서 팔았다. [이른바 마분지 계통 종이다. 섬유질이 그대로 남아서 참 자연적이었다...편집자주] 

돈이 생기면 이걸 사서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고 하면서 놀았다. 

조선시대는 종이가 더 귀한 시대인지라,

특히 지필묵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족들은 종이가 더 중요했다. 

묵재일기에는 묵재가 종이를 조달하는 방법이 다른 일기보다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그 자세한 내역은 나중에 써보기로 하고, 

그 중 흥미로운 것을 보면, 

향시가 끝난 후 그 시권을 그 동네 사족들에게 쓰시라고 나눠주는 것이다. 

물론 낙방한 시권이다. 

이 시권을 한 뭉치 받아서 묵재는 빈 부분을 잘라내 쓰기도 하고, 

뒷면을 쓰기도 하며, [이른바 이면지 활용]

그것도 안 되면 둘둘 말아서 절에 보내 닥종이 만들 때 함께 투입하여 종이를 새로 뜨게 했다. [조선시대 제지산업 핵심은 사찰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전에 어쨌건 과거 낙방한 시험지니 

한 번 쭉 훑어 봤을 것이다. 

뒷집 개똥이는 이걸 답이라고 써 놨나, 

앞집 돌쇠는 아예 글을 짓지를 못하는구나, 문리가 안 통하는 애네.

멀리도 아니고 그 동네 애들 낙방 시험지라 

아마도 묵재도 읽는 재미가 쏠쏠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요즘 같으면 개인 신상 유출로 큰일 날 일인데,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 낙방하면 인권도 없었던 시대라, 

내가 낸 시험답안 과거 떨어지면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 볼 것을 각오했어야 했다. 

요즘 보면 과거 시험지 낙방한 시권이 박물관 전시물에 걸려있는걸 보는데

필자가 보기엔 전부 시험지 재생해서 쓰라고 관에서 주변에 나눠준 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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