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방한 시험지는 아무나 보는 조선시대, 폐지 혹은 이면지 활용

조선시대는 종이가 귀한 시대다.
필자가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필자 어렸을 때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재생지인 갱지를 한 장에 얼마, 이렇게 계산해서 팔았다. [이른바 마분지 계통 종이다. 섬유질이 그대로 남아서 참 자연적이었다...편집자주]
돈이 생기면 이걸 사서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고 하면서 놀았다.
조선시대는 종이가 더 귀한 시대인지라,
특히 지필묵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족들은 종이가 더 중요했다.
묵재일기에는 묵재가 종이를 조달하는 방법이 다른 일기보다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그 자세한 내역은 나중에 써보기로 하고,
그 중 흥미로운 것을 보면,
향시가 끝난 후 그 시권을 그 동네 사족들에게 쓰시라고 나눠주는 것이다.
물론 낙방한 시권이다.
이 시권을 한 뭉치 받아서 묵재는 빈 부분을 잘라내 쓰기도 하고,
뒷면을 쓰기도 하며, [이른바 이면지 활용]
그것도 안 되면 둘둘 말아서 절에 보내 닥종이 만들 때 함께 투입하여 종이를 새로 뜨게 했다. [조선시대 제지산업 핵심은 사찰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전에 어쨌건 과거 낙방한 시험지니
한 번 쭉 훑어 봤을 것이다.
뒷집 개똥이는 이걸 답이라고 써 놨나,
앞집 돌쇠는 아예 글을 짓지를 못하는구나, 문리가 안 통하는 애네.
멀리도 아니고 그 동네 애들 낙방 시험지라
아마도 묵재도 읽는 재미가 쏠쏠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요즘 같으면 개인 신상 유출로 큰일 날 일인데,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 낙방하면 인권도 없었던 시대라,
내가 낸 시험답안 과거 떨어지면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 볼 것을 각오했어야 했다.
요즘 보면 과거 시험지 낙방한 시권이 박물관 전시물에 걸려있는걸 보는데
필자가 보기엔 전부 시험지 재생해서 쓰라고 관에서 주변에 나눠준 폐지다.